-2004년 프로 입단한 이근호, 3년간 2군에서 기량 갈고닦으며 최정상급 선수로 ‘우뚝’

-축구 인생 최고의 한 해였던 2012년···“누구와 붙어도 ‘이긴다’는 자신감 있었다”

-득점포 가동한 2014년 브라질 월드컵···“마음껏 웃을 수 없어 아쉬웠던 대회”

-부상으로 날아간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이근호는 아파하지 않고 마음껏 즐겼다?

-배려·존중 강조한 선수협 회장 이근호 “서로 협력해 K리그가 꿈인 선수 만들고 싶다”

활짝 웃는 울산 현대 공격수 이근호(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활짝 웃는 울산 현대 공격수 이근호(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울산]

왕성한 활동량을 앞세워 그라운드 이곳저곳을 쉴 새 없이 누비는 선수. 프로 3년 차까지 2군 무대를 전전했지만, 운동장 안팎에서 성실한 자세를 잃지 않으며 K리그 전설(269경기 71골 44도움)이 된 남자. 2007년 6월 29일 이라크와의 친선 경기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에 데뷔해 84경기(19골)를 뛴 이근호의 얘기다.

이근호는 보통 선수라면 주저앉을 상황을 여러 차례 이겨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최종 명단 탈락, 두 차례의 유럽 이적 실패 등을 겪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로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아팠던 시간을 한 단계 성장하는 발판으로 삼아 전성기를 구가했다.

2012년이 대표적이다. 이근호는 울산 현대 유니폼을 입고 뛴 그해 AFC(아시아축구연맹)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한국 선수가 이 상을 받은 건 1991년 김주성 이후 21년 만이었다. AFC 챔피언스리그(ACL)에서 대회 최초 무패 우승을 이끈 공이 컸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1차전 러시아와의 경기에선 멋진 중거리 골로 승점(1점)을 선물했다.

2019년부턴 더 나은 축구계를 만들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근호는 사단법인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K리그를 후배들이 뛰고 싶은 무대로 만들고 싶다’는 꿈이 이근호를 움직였다.

이근호는 어린 선수들과 얘기하면 가슴이 아플 때가 있다뛰고 싶은 리그를 물었을 때 ‘K리그’를 말하는 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대다수가 J리그(일본)나 유럽 리그를 꿈꾼다. K리그에서 축구 선수의 꿈을 이뤘고, 한국 축구 대표팀 선수로 월드컵까지 뛰었다. 누구보다 큰 사랑을 받았다. 후배들이 그런 K리그를 사랑하고 꿈꿀 수 있도록 힘을 더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엠스플뉴스는 K리그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한국 축구의 발전을 고민하는 이근호의 축구 인생을 들어봤다.

순탄하지 않았던 한국 축구 ‘레전드’ 이근호의 축구 인생

한국 축구 대표팀 공격수 이근호(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한국 축구 대표팀 공격수 이근호(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4월 28일 경남 FC와의 경기에서 부상 복귀전을 치렀습니다. 올 시즌 첫 공식전 출전이었습니다.

올겨울 준비를 단단히 하고 새 시즌에 돌입하려고 했는데 뜻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훈련 시작하자마자 무릎이 좋지 않아 수술을 받았어요. 선수 생활하면서 수술한 건 처음이었죠. 재활도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그라운드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웃음).

몸 관리가 철저한 선수입니다. 어쩌다가 무릎을 다친 겁니까.

훈련하면서 무릎을 다친 건 아니었습니다. 경기를 뛰면서 피로가 누적된 게 무릎 수술로 이어졌어요. 통증이 심하진 않았는데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수술하는 게 좋겠다’고 했죠. 수술을 마치고 시즌 중반에 돌아왔는데 잘 나가는 팀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거 같습니다.

4월 11일 팀 훈련에 합류했습니다. 이전까진 재활에만 매진했죠. 푸른 잔디 냄새가 그립더라고요(웃음). 경남전에서 교체로 투입됐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빨리 몸 상태를 최고치로 끌어올려서 많이 뛰고 싶다’고.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근호’는 그라운드에 있을 때 가치 있는 선수잖아요(웃음).

예나 지금이나 축구 열정엔 변함이 없습니다(웃음). 언제부터 축구와의 인연이 깊어지게 된 겁니까.

우리 형이 축구를 아주 좋아합니다. 어릴 때 형 따라다니면서 축구하다가 깊이 빠져들었죠. 저도 운동을 좋아했고요. 축구뿐 아니라 야구, 농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께 ‘축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어머니께선 바로 허락했습니까.

바로 교육청에 전화해서 축구부가 있는 학교를 알아봐 주셨습니다(하하). 그리고선 축구부 테스트를 받으러 무작정 찾아갔죠. 제가 다니던 학교엔 축구부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하게 됐고, 본격적인 축구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말이네요.

운동부 생활이 보통 힘든 게 아니잖아요. 어머니께서 ‘축구를 한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이유가 있을까요.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는 교육 철학을 가지고 계십니다. 축구부 생활을 시작하고서도 많이 응원해주시고 도와주셨습니다. 든든했죠(웃음).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니 어땠습니까.

밖에서 보는 것과 다르더라고요(하하). 제가 이전까지 한 건 공놀이었습니다. 축구부에 들어가면 ‘축구’만 종일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거죠. 하루도 빠짐없이 체력 훈련하고 축구부 내 규율도 굉장히 엄했습니다. 적응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축구하면서 딱 한 번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때였습니다.

축구부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네요.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니까 적응을 못 하겠더라고요(웃음). 하지만, 고민 끝에 축구부에 남기로 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컸고, 실력이 느는 게 보였거든요. 훈련이나 규율에 적응하는 게 어렵긴 했지만, 축구할 때 행복하니까 잠깐의 방황을 마무리하고 열심히 했죠.

초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나요.

제가 운이 좋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좋은 선수들과 함께 뛰었어요. 학창시절 대회 나가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가 많았죠. 주변에 잘하는 친구들이 있다 보니 저 역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축구 대표팀 출신 하대성이 제 초-중-고 동기예요. 저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볼을 잘 찼죠.

큰 어려움 없이 성장했습니다. ‘축구 선수로 성공하겠다’는 확신도 컸을 거 같아요.

어릴 땐 컸죠. ‘난 반드시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 뛸 거고, 유럽에 나가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실력을 겨루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웃음). 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꿈이 작아지더라고요. 고교 시절엔 프로 선수가 되는 게 최종 목표였습니다. 주변에 뛰어난 선수를 보면서 현실을 알게 된 거죠.

하지만, 부평고등학교 졸업 후 인천 유나이티드 창단 멤버로 프로 입단에 성공했습니다. 탄탄대로의 축구 인생을 걸어왔어요.

프로 선수가 되면 ‘성공’한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고교 시절까지만 해도 비슷한 연령대 선수들과 경쟁하잖아요. 프로에선 그게 아니죠. 나이와 관계없이 경쟁합니다. 기량이 뛰어난 외국인 선수들과도 경쟁하고요. 프로 경기에 뛰는 게 보통 힘든 것이 아니란 걸 확실히 느꼈죠.

그래도 꿈꿨던 프로 선수가 됐을 땐 기분이 남달랐을 거 같습니다.

기대가 컸죠. 훈련에 성실히 임하면 경기에 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벤치에 앉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선수는 많고 그라운드에 나갈 수 있는 이는 제한적이다 보니 벽을 느꼈죠. 그땐 1군 형들하고 같이 훈련하는 게 목표였어요(웃음).

프로 선수가 되기까지의 과정도 쉽지가 않습니다.

저는 프로팀에 와서가 더 힘들었습니다. 경쟁 상대가 많아진 데다 실력도 출중했거든요. 학창시절엔 못 해도 기회를 줍니다. 학생이니까 실수가 용납돼요. 하지만, 프로는 다르죠. 그라운드에서 뛸 기회가 주어졌을 때 완벽한 경기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조금만 부진하면 경쟁에서 밀릴 수 있는 냉정한 곳이죠(웃음).

벽을 느끼고 좌절할 수도 있지만, 이근호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았습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 항상 ‘부족한 선수’라고 생각해요. 쉬는 날에도 운동장에 나와 훈련해야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은 것도 있죠. 인천에서 자랐다 보니 주변에 친구가 많았습니다. 프로에서 뛸 때 대학교에서 뛰는 친구들을 자주 만났는데 ‘힘들다’고 하기가 어렵더라고요.

대학 무대가 프로보다 더 치열했던 건가요.

대학에서 뛰는 친구들은 고민이 많습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프로 입단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해지죠. 최대한 많은 경기를 뛰고 성과를 내야 하는 부담도 있고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세울 수 있는 경력을 쌓지 못하면 안 되잖아요. ‘내가 그 친구들보단 좋은 위치에 있으니 좌절하지 말고 죽을힘을 다해보자’ 다짐했죠.

2007년 대구로 트레이드된 이근호, 한국 축구 대표팀 선수로 ‘우뚝’

울산 현대 공격수 이근호(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울산 현대 공격수 이근호(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7년 대구 FC로 트레이드되면서 본격적인 프로 생활을 시작합니다.

제가 트레이드를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인천에서의 3년간 경기에 나선 횟수가 너무 적었거든요. 1년 차 땐 한 경기도 못 뛰었습니다. 2(5경기), 3년(3경기) 차 때도 크게 달라지는 게 없었죠. 심지어 3년간 뛴 8경기를 다 합쳐도 90분이 채 안 됐어요. 그래서 에이전트와 논의 끝에 결심했죠.

에이전트와 어떤 대화를 나눴습니까.

‘경기에 뛸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에이전트와 얘기한 건 다른 팀에서도 경기를 못 뛰면 내 잘못이다. 그때도 안 된다면 내셔널리그(당시엔 K리그2가 없었음)로 가서 경험을 쌓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하고 대구에 가서 본격적인 프로 경력을 쌓을 수 있었죠.

대구로 갈 때 자신감은 있었습니까.

인천에서의 마지막 시즌 때 2군 리그 MVP를 수상했습니다. 몸이 아주 좋았어요. 인천 동료나 형들도 ‘(이)근호 몸 좋다’고 했죠. 하지만, 명단에 못 들어가니까 실망감이 쌓이고,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라운드에 나설 기회만 주어진다면,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이근호의 선택은 성공으로 이어졌습니다. 2007시즌 대구에서 10골 3도움을 올렸습니다.

축구가 재밌었습니다(웃음). 프로에서 마음껏 그라운드를 누비니까 기분이 아주 좋더라고요. 변병주 전 감독께 정말 감사드려요. 제 단점보다 장점을 많이 봐주셨고, 항상 긍정적인 말 해주셨거든요. 경기를 치를수록 자신감이 붙고, 성과까지 낸 시즌이었습니다.

대중에게 이근호란 이름을 알린 대구에서 2시즌을 뛰었습니다. 잊지 못할 경기가 있을까요.

매 경기가 소중했죠. 경기 출전에 대한 그리움이 컸으니까. 굳이 한 경기를 꼽자면 첫 골을 넣었을 때가 기억에 남습니다. 전남 드래곤즈전이었는데 멀티골을 기록했거든요. 2-2로 비긴 게 아쉬웠지만 여러 감정을 느꼈습니다. 프로 입단 4년 만에 첫 골을 넣은 거라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죠.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어떤 생각이요?

‘인천이 이 경기를 봤으면 좋겠다’고. 대구에서 아주 잘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더라고요(웃음).

대구에 있을 때 한국 축구 대표팀에도 뽑혔습니다.

제가 가진 실력에 비해 운이 따른 거 같습니다. 변병주 전 감독께서 신뢰를 보내주신 덕분에 소속팀 경기에 꾸준히 출전했고 좋은 성과까지 냈죠. 그게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던 U-23 대표팀 발탁으로 이어지고, 한국 축구 대표팀까지 연결됐습니다. 핌 베어벡 전 감독이 성인 대표팀과 U-23 대표팀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저를 좋게 봐주신 거 같아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대구에서의 맹활약을 계기로 유럽 진출을 노렸습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소속이던 블랙번 로버스에서 두 차례나 영입 제안을 했다는 ‘설’도 있었습니다.

2008시즌을 마치고 대구와의 계약이 끝났을 때입니다.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믿을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았어요. 제가 알지 못하는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하는 경우도 있었죠. 모르는 에이전트들의 연락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팀에서 제안이 왔으니 가자’고 하는 거죠. 블랙번의 제안도 처음 보는 에이전트에게 들었습니다.

‘사실이 아니었다’는 말인가요?

블랙번에서 초청을 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에이전트와 상의 끝에 안 가기로 결정했죠. 냉정하게 저를 평가했을 때 ‘실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유럽으로 나간다면 네덜란드나 벨기에 등으로 가서 경험을 쌓길 원했어요. 그러다가 네덜란드 리그 소속 빌렘 II와 계약서 사인 직전까지 갔죠.

그런데 왜 사인하지 않았던 거죠.

프랑스 리그 소속 파리 생제르맹(PSG)에서 급작스럽게 연락이 왔거든요. 외국인 에이전트가 ‘여기(빌렘 II)보다 훨씬 좋은 팀에서 연락이 왔다. PSG로 가는 게 맞다’고 해서 빌렘 II와의 계약을 접고 파리로 넘어갔습니다. 거기서부터 꼬였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PSG와 계약 성사 직전까지 갔는데 비유럽인 등록 기간 문제가 있었습니다. 2009년 여름 다시 한 번 PSG에서 제안이 와서 이적을 추진했는데 뜻대로 풀리지 않았죠. 이때가 축구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던 거 같아요. 유럽 진출에 연달아 실패하면서 마음의 상처가 컸거든요. 그게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최종엔트리 탈락까지 이어졌으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맹활약(3골)에도 불구하고 슬럼프로 인해 최종 명단에 들지 못했습니다. 돌아보면 당시의 아픔이 현재의 이근호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줬다고 봅니까.

2009년 PSG 이적 실패 후 1년 6개월간은 컨디션이 계속 안 좋았습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 명단에 들지 못하고선 방황도 많이 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운동에만 집중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아픔을 딛고 일어선 이근호, 축구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다

한국 축구 대표팀 공격수 이근호(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한국 축구 대표팀 공격수 이근호(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2011년 이근호는 오뚝이처럼 일어섰습니다.

2011시즌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운동에만 매진하지 않으면 끝없이 추락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겨울 휴식기부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2010년 남아공엔 못 갔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목표로 구슬땀을 흘렸죠.

2011년 J리그 소속 감바 오사카에서 프로 데뷔 최다인 15골을 기록했습니다. 화려한 부활입니다.

시즌 준비를 철저히 한 까닭에 몸이 좋았습니다. 축구 선수가 좋은 경기력을 보이기 위해선 역시 훈련밖에 없다는 걸 느꼈죠. 한국 축구 대표팀에도 복귀하면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향해 조금씩 나아갔습니다.

2012년은 최고의 한 해로 볼 수 있습니다. 울산 현대로 이적해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1991년 김주성 이후 21년 만에 AFC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어요.

잊지 못할 한 해였죠(웃음). 한국에 들어와서 재미있게 축구했던 거 같아요. 두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몸 상태가 최상이었고, 김신욱, 곽태휘 등 최고의 동료와 함께 뛰었어요. 어느 팀과 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죠.

최고의 한 해를 보낸 뒤 입대를 선택했습니다.

처음엔 정말 가기 싫었죠(하하).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곳이니 ‘선수로서 한층 성장해오자’란 생각을 갖고 군 생활을 했습니다. 재밌었어요. 학창시절 합숙하던 때처럼 많은 추억을 만들었죠. 특히나 상무에서 군 생활을 했잖아요. 축구를 할 수 있는 곳에서 군 생활을 했으니 감사했습니다.

입대(2013년)했을 때 K리그2가 처음 생겼습니다. 그곳에서 득점왕과 최우수선수상을 동시 석권했어요.

당시 K리그2는 K리그1과 수준 차이가 있었어요. 수준급 외국인 선수가 많지 않았고, 지금처럼 임대가 활성화되지 않았죠. 하지만, 지금은 격차가 줄었습니다. K리그2에도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 뛸 만한 능력을 갖춘 선수가 있고, 외국인 선수도 기량이 우수하고요.

이근호의 군대 시절 빼놓을 수 없는 얘기는 역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아니겠습니까(웃음).

하하. 본선 조별리그 1차전 러시아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었죠. 평생 잊지 못할 순간입니다. 하지만, 아쉽기도 해요. 2010년 남아공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확실히 털어냈지만, 팀 성적이 안 좋았죠. 분위기가 가라앉다 보니 힘들더라고요. 축구는 단체 스포츠잖아요. 저보단 팀이 우선이죠. 골을 넣은 건 기뻤지만, 성적에 대한 책임이 있는 대회였습니다.

눈앞에서 놓친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이근호는 대회를 마음껏 즐겼다?

울산 현대 공격수 이근호(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울산 현대 공격수 이근호(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18년 9월 16일 병역을 마치고선 카타르 리그 소속 엘 자이시 SC로 이적합니다.

생활이 예상보다 괜찮았습니다(웃음). 사람들이 카타르 하면 사막만 떠올리잖아요. 운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잘 만들어져 있고, 공공시설도 아주 좋더라고요. 그런데 축구가 어려웠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축구와는 조금 달랐어요. 팀이 아닌 개인 기량에 크게 의존하는 축구를 했죠.

한 선수에 의존한다는 말인가요?

카타르 리그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들은 수준이 아주 높습니다. 2015년 7월부터 카타르 리그(알 사드 SC)에서 뛰고 있는 사비 에르난데스가 대표적이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스페인의 우승을 이끈 선수 아닙니까. 연봉을 많이 주는 까닭에 카타르 리그엔 수준급 선수가 많습니다. 카타르 선수들과 수준 차이가 있다 보니 외국인 선수 의존도가 높죠.

카타르 리그에선 아쉬움이 많았던 거 같습니다.

카타르 리그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는 빠르게 결과물을 내야 했는데, 전 그러지 못했죠. 초반에 공격 포인트를 쌓지 못하면서 적응이 힘들었습니다. 제 잘못이죠.

결국 2015년 7월 전북 현대로 이적(임대)합니다. 이듬해엔 제주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고요. 월드컵을 경험하면서 한 단계 성장을 이루었는데, 유럽 진출에 대한 욕심은 없었나요.

PSG와의 두 차례 협상이 실패한 이후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구체적인 영입 제안도 없었고요. 아쉽긴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 온 힘을 다하자고 생각했죠. 2018년 러시아 월드컵만 바라보고 운동했습니다.

2017년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정상급 팀에서 뛰던 이근호가 승격팀 강원 FC로 이적했습니다.

제주와의 협상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가운데 강원에서 제안이 왔어요. 며칠 고민했죠. 그러다가 강원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백)종환(대전 시티즌)이랑 초-중-고 동기예요. 그 친구가 당시 강원에 있었는데 같은 팀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고교 동창인 (김)승용(인천 유나이티드)이도 강원과 협상을 하고 있단 사실을 알고선 바로 계약했죠.

승격팀은 우승이 아닌 생존을 목표로 합니다. 강원이 이근호, 정조국, 김승용 등 수준급 선수를 영입하긴 했지만, 성적을 장담할 순 없었어요. 부담이나 두려움은 없었습니까.

처음엔 종환이가 제 이적을 반대했어요. 그 친구는 ‘네가 생각하는 팀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기업구단과 비교해 운동 환경이 열악하고, 지는 날이 많다’고 했죠. K리그2에서 올라온 팀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일단 친구들과 다시 뭉쳐서 축구한다는 생각에 설렜습니다. 우리가 잘 준비하면 충분히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도 있었고요.

강원에서 1년 6개월을 보냈습니다.

매 경기 쉽진 않았지만 재밌게 축구했던 거 같아요. 딱 하나 빼고요. 2018년 5월 19일 경남 FC와의 경기에서 무릎을 다쳐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출전이 좌절됐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쉬웠죠. 월드컵 개막 직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다쳤으니까.

2014년 이후 러시아 월드컵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월드컵 본선에서 손흥민과 함께 최전방을 책임질 적임자로 꼽혔고요.

지나간 일이니까 어쩔 수 없죠(웃음). 솔직히 그런 생각도 해요. 당시 경기 출전을 안 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프로잖아요. 강원이 승점을 쌓아야 하는 상황이었고, 팀 중심으로서 출전하는 게 맞는 거였죠.

경험이 쌓인 베테랑이지만, 그런 상황은 힘들었을 거 같습니다.

당시엔 힘들었습니다(웃음). 하지만,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최종명단 탈락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방황을 안 했죠. 월드컵은 못 가지만 축구 인생이 끝난 건 아니었으니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울해하면 저만 손해잖아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선 해설을 했습니다.

하하. 처음엔 주변 분들이 걱정했습니다. ‘월드컵을 볼 수 있겠냐’고. 전 좋은 경험이 될 거 같아서 며칠 고민하다가 해설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죠.

선수로 뛸 때와 해설로 월드컵을 볼 때, 어떻게 다릅니까.

그라운드 밖에서 월드컵을 보니까 진짜 재밌었습니다. ‘와’란 감탄사가 절로 나오던데요(웃음). 사람들이 월드컵을 ‘세계인의 축제’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선수로선 압박감이 컸거든요. 월드컵에선 무조건 좋은 성적을 내야 하고, 경기력까지 잡아야 하니까 스트레스가 심했죠. 마음 편히 월드컵을 보니 확실히 달랐습니다. 이런 생각도 했어요.

어떤 생각이요?

‘은퇴하고 나면 가족들과 함께 월드컵 보러 다녀야겠다’고(웃음). 하지만, 한국 경기는 보는 게 힘들었습니다. ‘부상만 아니었으면 나도 저 자리에 있을 텐데’란 생각이 들었죠. 또한 선수들이 얼마만큼 준비하고 힘들었을지 아니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본선 조별리그 1, 2차전 성적이 좋지 않았잖아요.

‘디펜딩 챔피언’ 독일전은 어떻게 봤습니까. 한국이 독일을 2-0으로 이겼습니다.

‘기쁘다’기보단 '감동'적이었습니다. 선수들이 세계 최강 독일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한 발 더 뛰는 게 보였어요.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뛰고, 몸을 날려 상대 슈팅을 막아내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승리까지 따냈습니다. 살짝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았습니다(웃음).

이근호, 다시 돌아온 울산에서 한국프로축구선수를 대표하는 회장으로 거듭나다

K리그와 울산 현대에 대한 애정을 여러 차례 나타낸 이근호(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K리그와 울산 현대에 대한 애정을 여러 차례 나타낸 이근호(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18년 6월 친정이나 다름없는 울산으로 복귀합니다.

사실 전북 임대 마치고 제주 이적할 때부터 울산과의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축구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를 보낸 팀인 만큼 돌아오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조금씩 어긋나는 바람에 복귀가 늦어졌습니다(웃음). 공격 포지션에 선수가 찬 경우가 있었고, 감독님이 영입을 원하지 않는 때도 있었죠. 그러다가 월드컵 휴식기를 마치고 울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울산에 대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K리그1을 대표하는 클럽이잖아요(웃음). 집처럼 편합니다. 올 시즌에 팀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보탬이 되고 싶어요. 날 믿어주는 구단, 동료, 팬들을 위해서요. 그동안 전북 현대와 비교해 살짝 뒤처지는 감이 있었는데 기회도 왔습니다. 2012년 못잖은 시즌을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울산으로 이적 후엔 사단법인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 회장직도 맡게 됐습니다.

잘 몰라서 한 거예요(하하). 많은 분이 모르시겠지만, 2019년부터 선수협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선수협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된 겁니까.

2016년 제주에서 뛸 때 선수협 김훈기 사무총장과 만나게 됐죠. 처음엔 큰 관심이 없었는데 설명을 들어보니까 이게 꼭 필요한 단체더라고요. 그때 선수협에 가입했습니다. 후배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합리한 일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그런 걸 보고 외면하는 건 선배의 도리가 아닌 거 같더라고요.

한국에선 선수협의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고민은 없었습니까.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게 사실이죠. 하지만, 선수협은 필요한 게 아니라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단체입니다. 그걸 알리고 싶어요. 최소한 선수가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하잖아요.

선수 생활하면서 선수협의 필요성을 느낀 때가 있습니까.

솔직히 전 크게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 건 있었죠. 불이익을 받는 건 선수인데 구단이나 임원 등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 그렇다고 ‘이건 아닙니다’라고 외치기는 어렵고. 괜히 나섰다가 불이익을 받는 건 아닐까 두려움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축구계에서 불합리한 일을 직접 본 적은 있나요.

힘없는 후배들의 경우엔 본인 동의 없이 팀을 옮기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계약 기간이 남아있지만 팀을 떠나기도 하죠.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쫓겨나는 겁니다. 그런 걸 알면서도 ‘당연한’ 일로 치부하면서 외면하진 않았나 반성합니다. 지금이라도 잘못된 걸 하나씩 바로잡고 싶은 마음입니다.

2018년 12월 선수협 회장이 되고 5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렵습니다(웃음). 지금까지 축구만 했잖아요. 행정적인 건 처음이다 보니까 부족한 게 많습니다. 특히나 선수협이라고 해서 선수 권리만 생각할 순 없습니다. 구단이나 한국프로축구연맹 등의 입장을 들어보고 합의점을 찾아야 하죠.

선수협은 선수를 위해 존재하는 단체 아닙니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물론 선수를 대변하는 단체는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만 생각할 순 없어요. 선수가 구단에 잘못하는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먼저 프로선수의 자세를 갖추지 못하면 상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프로다운 모습을 보이고 나서 잘못된 게 있으면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만큼 상대를 존중하는 게 중요합니다.

존중이요?

우린 팬이 있어 프로축구 선수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구단이 있어 생계 걱정하지 않고 축구에만 매진할 수 있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구단이나 연맹 등의 입장을 들어봐야 하는 이유고요.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데 소통이 되고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은 없습니다. 한국 축구는 함께 나아가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어요.

선수, 구단, 연맹 등이 함께 나아간다는 말인가요.

축구는 단체 스포츠입니다. 한 명만 잘해선 이길 수 없죠.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 모두 나눠 가지는 게 축구입니다. 선수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게 있어요. ‘선수 이익만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고. 팬, 구단, 연맹 등이 없으면 우린 존재할 수 없어요. 잊어선 안 됩니다.

공부할 게 많을 거 같습니다.

선수협은 3월부터 K리그1, 2 구단을 돌며 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선수협이 왜 필요한지 알리고, 프로선수로서 갖춰야 할 자세 등을 말해주고 있어요. 구단이나 연맹이 갖는 애로사항 등도 알려줍니다.

하지만, 선수의 권리를 위해서라면 구단이나 협회와 대립각을 세워야 할 때도 있지 않나요.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는 표현보다 ‘합의점을 찾기 위해 소통한다’고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실제로도 우리가 먼저 다가가 대화하면서 잘못된 걸 고쳐가기 위해 고민하고 있고요.

팬들에 다가서는 일도 중요할 거 같아요.

교육하면 꼭 얘기하죠. ‘우리가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건 팬이 있어서’라고. 팬들이 사인을 요청하면 ‘무조건 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프로선수의 기본이자 당연히 해야 할 의무거든요. 선수 생활을 하면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요?

경기에서 패한 날엔 구단이나 선배 눈치가 보여서 사인을 못 해주는 거죠. 자신이 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인을 해줘도 되나’ 고민하는 친구도 있어요. 그런 친구일수록 팬에게 먼저 다가가야죠. 그게 프로선수 아닌가요? 선수협은 선수의 권익 향상뿐 아니라 쌍방향 소통, 프로선수의 자세 등도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식개선이네요.

지금까지 당연시돼 왔던 잘못된 문화를 바꾸려면 나부터 변해야죠. 선수협이 구단, 연맹과 소통하면서 한국 축구가 한 단계 도약하는 데 힘이 되길 바랍니다.

솔직히 선수협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선수 아닙니까. 이근호는 엘리트 코스를 차례로 거친 한국 축구의 레전드입니다.

선수협 회장으로 활동한다고 해서 제가 얻을 수 있는 혜택은 없죠. 하나도 없습니다(하하). 하지만, 제가 앞장서면 프로에 있는 후배 혹은 축구 선수를 꿈꾸는 유망주들이 혜택을 누릴 순 있을 거 같아요. 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선수가 사라져야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서도 좋은 거잖아요. 건강한 리그가 돼야 더 훌륭한 선수가 나오죠.

10년이 흘렀을 때 어떤 모습을 한 축구계를 그립니까.

어린 친구들하고 얘기하면 가슴이 아플 때가 있어요. ‘어떤 팀에 가고 싶니’라고 물으면 ‘K리그’라고 답하는 친구가 없어요. J리그나 유럽 리그를 꿈꾸는 이가 수두룩합니다. 전 K리그에서 축구 선수의 꿈을 이뤘고, 한국 축구 대표팀 선수로 월드컵까지 뛰었어요. 누구보다 K리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사랑합니다. 후배들이 'K리그 선수'란 꿈을 키울 수 있도록 건강한 리그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싶습니다.

한국 축구를 향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축구는 제 삶의 전부입니다. 축구를 빼면 이근호란 사람을 얘기할 수 있나요? 이야깃거리가 없어요(웃음).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준 축구를 위해 저도 무언가를 하고 싶습니다. 구단, 연맹, 팬 등 제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분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꿈을 꾸고 성장할 수 있도록 힘쓰고 싶고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항상 응원해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선수협 역시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곳인 까닭에 때론 잘못된 길을 걸을 수 있고 실수도 많을 겁니다. 그럴 땐 질책해주세요. 잘한 일이 있을 땐 칭찬도 해주시고요. 우리만의 이익이 아닌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나아가는 단체가 될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염)기훈이 형, (박)주호, (김)신욱이 등도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선수협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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