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x3 농구 국가대표팀 '주장' 이승준(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3x3 농구 국가대표팀 '주장' 이승준(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엠스플뉴스]

셀 수 없이 코트를 누볐지만, ‘국가대표’란 단어는 여전히 가슴을 떨리게 하는 단어다. 과거 태극기만 유니폼에 달면 없던 힘도 솟아났다. 그리고 불혹을 넘은 나이에 다시 태극마크를 달 기회를 잡았다. 3x3 농구 대표팀에 발탁된 이승준(41·팀 에너스킨)의 얘기다.

사실 은퇴 당시만 해도 국가대표 재승선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저 아마추어 선수들과 틈틈이 농구를 즐기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후배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많은 걸 바꿨다. “3x3 농구 어때요?”

한 후배의 권유로 별생각 없이 ‘3x3 농구’를 시작했던 이승준은 이내 농구의 새로운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대회에서 연이어 좋은 성적을 내자 국가대표 재승선 꿈도 현실로 다가왔고, 끝내 ‘KOREA’ 유니폼을 다시 걸치게 됐다.

2017 FIBA 3x3 월드컵에서 ‘어머니의 나라’ 대한민국을 대표해 코트를 누빈 이승준은 지난 4월 13일엔 2019 FIBA 아시아컵 대표팀으로 뽑히는 쾌거도 이뤘다. 아시아컵 우승을 넘어 2020년 도쿄 올림픽 출전까지 꿈꾸는 이승준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만 41세다. 농구를 향한 사랑과 열정이 없으면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쉽지 않은 나이인데.

3x3 농구를 시작도 했고, 이대로 그만둘 순 없지 않은가? (웃음)

요즘 몸 상태가 부쩍 좋아졌다고 들었다.

아픈 곳이 다 없어졌다. 트레이너를 만나 몸을 다시 만들었다. 은퇴했을 때보다 지금 몸 상태가 더 좋다. 트레이너에게 고맙다.

은퇴 당시엔 허리와 아킬레스건에 큰 부상이 있었다.

운동선수들은 한 군데씩 아픈 데가 있다. 아픈 곳이 없는 선수는 없다. 그래도 뭔가 잘 쉬었나 보다. 새로운 트레이너가 운동 계획을 잘 짜줘 몸이 다시 살아난 것 같다.

비용도 많이 들고 훈련도 만만치 않다. 이미 KBL에서 많은 것을 이루기도 했다. 그런데도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는 이유가 궁금하다.

올림픽이다. 1년 전 3x3 농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올림픽만 바라보고 있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따긴 했지만, 농구 선수로 올림픽에 나간다면 무척 기쁠 것 같다. 우리나라 농구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단 한 번도 이 무대에 나서지 못했다. 팬들이 농구 대표팀이 올림픽에 나가길 고대하고 계시는데 한 번 다시 나갔으면 좋겠다.

농구를 사랑하는 게 느껴진다. 그런데 어렸을 때 축구를 더 좋아했다는 소문이 있다.

어디서 들었나? (웃음) 원래 축구를 더 좋아했다.

축구를 포기하고 농구 선수로 진로를 튼 계기는 무엇인가.

(이)동준이 덕분에 농구를 시작하게 됐다. 동생은 농구를 좋아했고, 난 축구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래서 축구를 1~2년 동안 했는데 재미가 없더라. 그러니까 동준이가 ‘아~ 형! 농구 좀 하자’ 그래서 농구를 시작하게 됐다.

선수 생활이 순탄치는 않았다. 브라질, 카타르, 폴란드 등 다양한 무대를 오갔다. 그러다 2007년 한국으로 눈을 돌렸다.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너무 옛날 일이라... NBA 서머리그를 준비 중이었다. 그때 에이전트가 한국 교포였는데 ‘혹시 한국에서 뛰고 싶은 생각 없느냐’라고 물어 ‘아직 NBA에서 뛰고 싶다’고 답했다. 그런데 동준이 생각이 났다. 동준이가 농구를 좀 했다. 당시 시애틀 은행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만약에 연결이 잘되면 동준이가 한국에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따로 연락했고 동준이가 연세대에 들어가게 됐다. 연세대에 가서 2년 동안 뛴 후 프로에 갔다. 귀화도 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포인트가드로 뛰고 있는데, 동준이에게 연락이 왔다. ‘형, 한국 좀 빨리 오세요. 대표팀 유니폼 입으면 생각이 바뀔 거에요. 이 유니폼 그냥 유니폼 아닙니다. 한 번 좀 오세요’라고 했다. ‘그래? 대표팀 유니폼이 그렇게 좋아?’ 사실 그땐 어떤 느낌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동준이 말을 듣고, 그다음 시즌에 한국에 왔다.

KBL 데뷔 첫해 외국인 선수 자격(에릭 산드린)으로 뛰었다. 그 당시에 발목 부상에 부진까지 겹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래도 다시 한국행을 택했는데.

첫 시즌은 매우 힘들었다. 모비스는 전 시즌 우승팀이었다. 하지만 양동근, 김동우 등 주축선수들이 군대에 들어가다 보니 9위로 처졌다. 진짜 못했다. 발목도 다쳤고, 운이 없는 시즌이었다. 그런데 체육관에서 경기도 치르고 동생이 플레이하는 걸 보다보니 한국 농구가 너무 재밌다는 걸 느꼈다. 또 한국이 본격적으로 귀화 선수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전 시즌은 너무 아쉬웠지만, 앞으로의 큰 그림을 생각해 한국으로 왔다.

맨 처음 국가대표 유니폼 입었던 날 기억하나.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한다. 태릉 선수촌에 있었는데 그때 여름이 유독 더웠다. (전)태풍이가 룸메이트였는데 ‘우와 덥다’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땀도 나고. 그런데 유니폼이 왔다. 아직도 그 사진이 있다.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유니폼을 침대 위에 뒀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 옷 너무 이쁘다’ 아직도 그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

국가대표 발탁에 좀 더 애착이 간 이유는?

사실 미국 대표팀에 들어가긴 힘들다. 르브론 제임스, 코비 브라이언트 등 A급 선수들이 즐비하다. 굉장히 들어가기 어렵다. 어릴 때 한국 문화에 대해선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와서 더 많은 걸 배웠다. 오기 전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밖에 몰랐다. 이후 언어와 문화를 배우면서 가족 사이가 좀 더 돈독해졌다. 우리 삼촌이 어떤 성격인지 그제야 알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어머니의 나라, 그 나라의 유니폼을 입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광이고 영예다.

그래도 문화적응이 힘들었을 것 같다. 한국은 훈련량이 엄청난 것으로 유명하다.

(혀를 내두르며) 많긴 많다.

위계질서 문화도 적응하기 어려웠겠다.

힘들었다. 그런 문화를 아예 몰랐다. 당연히 운동도 많이 했다. 첫 훈련은 태백산 등산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 산을 왜?’ 당시 오전, 오후 내내 공 없이 태백산을 오르내렸다. 그래도 동료들과 함께 힘든 운동을 같이하면 뭔가 끈끈한 게 생긴다. 한 가족이 된다. 이제 와 생각이 드는 거지만, 고통 없는 노력은 없다. 운동을 많이 하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것 덕분에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 됐다.

동생 이동준과의 첫 맞대결과 국가대표 첫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은데

모비스에서 뛸 때 첫 경기에 동준이를 만났다. 동준이 앞에서 3점 슛을 넣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또 신기한 게 동준이 유니폼 뒤엔 이동준, 나는 산드린. ‘같은 형제인데 이름이 왜 틀리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직도 기억난다. 국가대표 시절엔 유니폼을 처음 받았을 때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아시안게임 결승전을 치르기에 앞서 유재학 감독님이 대표팀 선수들을 불러모아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으면 그냥 경기가 아니다. 열심히 해야 한다. 모든 팬이 다 지켜보고 있다’고 하셨는데, 라커룸에서 하신 이 말씀도 기억이 난다.

유독 국가대표팀에선 좋은 활약을 펼쳤다. 소속팀 팬들 사이에선 ‘유니폼에 태극기를 달아야 더 잘하겠네’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는데 기억하나.

대표팀 유니폼을 입으면 슈퍼맨이 될 수 있다. 에너지도 생기고 스피드도 좀 더 빨라진다. 뭔가 그 유니폼을 입으면 힘이 생긴다.

만 18세 이후에 국적을 바꾼 선수는 대표팀에 한 명밖에 뽑지 못한다는 규정 때문에 형제가 함께 태극마크를 달고 경기에 나서진 못했다. 아쉽진 않았나.

아쉬웠다. 귀화 선수는 딱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3X3 농구도 비슷한 룰이 있어 아쉽다. 내 꿈은 동준이와 대표팀 유니폼을 같이 입는 거다.

규정이 바뀌어서 형제가 같이 뛰는 장면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끝나고 FIBA에 전화 한 통 걸어주면 좋겠다. (웃음)

이동준 선수와 KBL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우리가 얘기했던 게 만약에 그만두고 싶으면 같이 은퇴하자고 했었다. 후회는 하나도 없다. 그때 재밌게 농구를 했고, 같이 즐겼다. 정말 좋았다. 제일 감사한 게 포르투갈에 있을 때 동준이가 ‘형, 한국에 빨리 오세요’라고 전화를 했었는데, 만일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마 한국에 없었을 거다.

동생이지만, 은인 같기도 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것 같다.

팀 에너스킨(이승준·박진수·장동영·김동우)(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팀 에너스킨(이승준·박진수·장동영·김동우)(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은퇴하고 2017년에 갑자기 3x3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게 됐다.

처음엔 그냥 동아리 농구를 했다. 미군 부대에 들어가서 친구들과 함께 농구 경기를 즐겼다. 그런데 후배한테 전화 한 통이 왔다. ‘3X3 농구 어때요?’ ‘3x3? 오케이, 해보자’. 해보니 생각보다 너무 재밌었다. 또 그때부터 한국에서 3X3 농구 대회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대회에 몇 번 나가다 보니 후배가 ‘형, 이번 대회 이기면 우리 프랑스 갈 수 있어요’라고 해서 ‘그럼 이기자’라고 마음을 먹고 본격적으로 몸을 만들었다.

프랑스 낭트에서 열린 2017 FIBA 3x3 월드컵을 마친 후 새로운 팀인 팀 에너스킨을 결성하게 됐다. 당시 얘기가 궁금하다.

지난해 여름에 연습 경기를 치르고 있는데 에너스킨 대표님이 우리를 보러 왔다. 그때 처음 만났다. 에너스킨에서 후원해주고 싶다면서 레그 슬리브도 받았다. ‘운동 중인데 나중에 입을게요. 감사합니다’하고 넘겼다. 타이츠가 뭐가 다르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 이후 한 번 입어봤는데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이제 경기에 나갈 때 이거 안 입으면 못 뛴다. 이 타이츠가 뭔가 몸을 잘 잡는다. 몸을 풀 때 빨리 풀린다. 힘이 계속 있는 느낌, 든든한 느낌이 들어 정말 좋다.

아시아컵 이후 다음 목표로 내세운 건 2020년 올림픽이다. 그때 나이가 만으로 42세다. 그래도 자신 있나.

자신 있다. 몸은 아직도 괜찮다. 3X3 농구 시합을 많이 뛰면 충분히 나갈 수 있다. 5X5와 달리 3X3엔 르브론 제임스 같은 선수는 없다. 선수들 레벨은 거의 비슷하다. 노하우와 힘 그리고 파이팅이 있으면 당연히 이길 수 있다. 지금 제일 잘하는 팀은 세르비아다. 작년 6월쯤에 한 번 붙어봤다. 잘한다. 그런데 보니까 열심히 연습하고 대회에 나가 경험을 쌓으면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후 선전을 기대하는 팬들께 한마디.

그동안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아시아컵, 월드컵 나갈 때 응원 많이 해주시면 정말 좋겠다. 너무 사랑한다(손 하트).

정재열 기자 jungjeyoul1@mbcplus.com

촬영협조 : 에너스킨 코리아

저작권자 © 스포츠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 후원하기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