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가의 보도가 된 구단 고과, 완벽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아

-구단마다 고과 산정 기준 제각각…모든 선수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직업 선택의 자유 없는 프로야구, 연봉조정신청 제도는 선수의 권리

-2011년 이대호 조정위원회는 구단 고과를 조정기준 삼아 논란…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 만들어야

KT 위즈 투수 주권(사진=엠스플뉴스)
KT 위즈 투수 주권(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

최근 KBO리그 연봉협상에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구단 쪽에서 내세우는 ‘전가의 보도’가 있다. 바로 구단 자체 고과라는 만능 치트키다.

지난겨울 삼성 구자욱의 연봉협상 과정에 마찰이 생겼을 때도, 이번 KT 주권의 연봉조정 신청 뒤에도 구단 측에선 정교한 자체 고과 시스템을 강조하고 나섰다. 시스템에 기록을 넣으면 자동으로 고과가 산출돼서 나온다, 모든 선수가 마찬가지다, 다른 선수와 형평성 때문에 더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다는 논리다.

구단 고과 체계가 과거보다 훨씬 정교해진 것은 맞다. 옛날 프로야구 연봉협상은 우격다짐과 막무가내가 주를 이뤘다. 모 구단 단장을 지낸 체육인은 “선수마다 집 앞에 찾아가 밤새 술을 마시면서 도장을 받았다”고 했다. 말로 안 되면 살살 달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교묘한 책략을 동원해 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선수도 벼랑 끝 전술을 동원하며 맞섰다.

지금은 다양하고 세밀한 평가 기준을 동원해 고과를 산출한다. 구단마다 차이는 있지만 적게는 100여 개에서 많게는 300개 항목을 평가한다. 수치화가 가능한 항목 외에도 인성과 생활 태도, 작전 수행 능력, 팬서비스 등 정성평가도 포함한다. 여기에 각종 기록과 코칭스태프 평가 등을 반영해 연봉을 책정한다.

구단 고과는 완벽하지 않다…구단마다 제각각, 가중치 따라 다른 결과

KBO 역대 연봉조정위원회 결과는 1승 19패로 선수 측의 완패로 끝났다(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KBO 역대 연봉조정위원회 결과는 1승 19패로 선수 측의 완패로 끝났다(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으로 산출해 모든 팀원에게 공평하게 적용하는 고과니까 선수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일까. 완전무결하고 흠없는 절대기준으로 여기고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과는 10개 구단 공통의 표준이 아니다. 각 구단마다 특화된 기준을 따른다. 구단마다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가중치를 부여해 시스템을 구축한다. 그래서 비슷한 성적을 내고도 어떤 팀 선수는 좋은 대우를 받는 반면, 다른 팀 선수는 ’언해피’ 상태가 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어떤 식으로 계산하는지 잘 공개하지도 않고, 팀 성적 등 변수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마치 이용자가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모른채 사용하는 검색엔진 알고리즘 같다.

모든 선수에게 고과가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9년 만에 연봉조정신청 선수가 나온 KT 위즈를 비롯해 적지 않은 구단이 다른 포지션에 비해 불펜투수 연봉을 야박하게 책정하는 경향이 있다. KT의 경우 WAR(대체선수대비 기여승수) 마이너스를 기록한 내야수들은 연봉이 대폭 인상됐다. 반면 중간투수들은 대부분 소폭 인상에 그치거나 동결에 가까운 금액에 계약했다.

언론에 대고 ‘투수 고과 1위’라 칭찬했던 불펜 에이스 주권은 3,000만 원 차이를 좁히지 못해 KBO에 연봉조정을 신청했다. 좌완 불펜투수로 크게 활약한 조현우는 기존 3,000만원에서 150% 인상된 7,500만원에 계약했다. 좌완 하준호는 4,500만원에서 33% 오른 6,000만원에 계약했다. 김민수는 8% 오른 7,000만원에, 전유수는 5% 오른 1억 500만 원에 계약했다.

생애 첫 FA 자격을 포기하고 KT에 잔류한 유원상은 4,000만원에서 4,000만원 오른 8,000만원에 사인했다. 유원상은 지난해 팀 내 투수 중에 주권 다음으로 많은 62경기에 등판해(리그 8위) 역시 팀 내 2위에 해당하는 64이닝을 던졌다. 후반기 성적 부진은 잦은 등판에 따른 컨디션 난조가 가져온 결과라고 봐야 한다.

만약 FA를 신청했다면 C등급이라 충분히 다른 팀 이적도 가능했다. 이적했다면 적어도 8천만 원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FA를 포기하고 KT에 남기로 했을 때 구단에서 어느 정도 대우해줄 거란 기대가 있었을 게다. 그러나 FA 포기에 따른 보상은 없었다. 팀 내 두 번째로 많은 경기에 등판하며 고생한 데 대한 보상도 없었다. 고과 시스템에 따라 산출한 8,000만원의 연봉이 전부였다.

구단 고과는 선수가 동의해서 만들어진 시스템이 아니다. 구단이 만들어 놓고 소속 선수에게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한 에이전시 대표는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는 프로야구 선수에게 구단에 특화된 고과는 불리한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직장인 홍길동 씨는 회사가 자신을 능력만큼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다른 회사로 이직할 수 있다. 프로야구 선수는 그런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신인드래프트부터 FA까지 꼼짝없이 한 팀에 머물러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팀이 아닌 자신을 선택하는 팀 유니폼을 입는 시스템이다.

만약 시스템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다간 불이익을 받고 직업을 잃는다. 8년을 채워 FA 자격을 얻어야 그나마 직장 선택 자유가 주어진다. 이 자유조차도 완벽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다. 간혹 의리를 지키려고 FA 권리를 포기했다가 연봉협상 때 뒤통수를 맞기도 한다.

구단 고과 따랐던 과거의 연봉조정위원회…구단 고과 매트릭스에서 벗어나라

10년전 이대호 연봉조정위원회는 이대호의 패배로 끝났다. 조정위원들은 구단 고과를 기준으로 판단을 내렸다(사진=엠스플뉴스)
10년전 이대호 연봉조정위원회는 이대호의 패배로 끝났다. 조정위원들은 구단 고과를 기준으로 판단을 내렸다(사진=엠스플뉴스)

선수가 원하는 팀을 선택할 수 없는 환경에서 구단이 정한 고과를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요구는 불합리하다. 구단이 제시한 연봉이 부당하다고 느끼면 이의를 제기할 수단이 있어야 한다. 구단이 짜놓은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동등하게 협상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연봉조정신청이란 제도가 있는 것이다.

그간 KBO의 연봉조정신청 제도는 유명무실했다. 20차례 열린 위원회에서 선수가 이긴 건 1번뿐이고 19번은 구단의 승리로 끝났다. 조정위원 선정 기준도, 뚜렷한 조정 기준도 없다 보니 주먹구구식으로 위원회를 진행했다. 조정위원 구성은 주로 KBO와 구단 측 인사로 이뤄졌다. 판단 기준이 마땅찮은 조정위원들은 구단에서 제출한 자체 고과를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선수가 이길 도리가 없었다.

10년 전인 2011년 이대호 연봉조정위원회 당시 이상일 KBO 사무총장은 “구단 자체 고과가 제일 기준이 될 것이다. 타 구단 선수와 연봉을 비교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 앞으로 연봉조정에서도 다른 구단 선수의 연봉은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겠다”라며 기준을 제시했다. 구단 고과가 부당하다고 연봉조정을 신청했더니 구단 고과를 기준으로 구단 손을 들어준 셈이다. 취업규칙이 부당하다고 노동청에 신고하니 취업규칙을 기준으로 회사 편을 든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에 열리는 조정위원회에선 10년 전과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구단 고과를 조정기준으로 삼는 건 제도의 취지에 어긋난다. 구단 고과는 구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공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프로야구선수협회 사무총장을 지낸 김선웅 변호사는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구단이 강조하는 고과는 연봉조정판정에 있어서 구단의 주관적인 자료”라고 지적했다.

메이저리그의 경우 아예 조정기준을 문서로 정해놓고 팀 공헌도, 전년도 연봉, 비슷한 경력을 가진 선수의 연봉을 비교해 판단을 내린다. 김 변호사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자료, 즉, 리그의 유사한 선수의 연봉이 판정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고 썼다. 현재 KBO리그에서 불펜투수가 갖는 객관적 가치, 주권과 비슷한 활약을 펼친 불펜투수가 받는 연봉이 기준이 될 수 있다. 저평가된 불펜투수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각 구단이 그간 연봉협상에서 홀대했던 불펜투수의 고과 기준을 새롭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면 더욱더 좋은 일이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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