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KBO 신인 지명 합격 확률 약 10%, 나머지 90% 제2의 길 찾아야

-‘박용택 동문’ 선출 체육교사 김현율 선생님 “야구만 인생의 정답 아니다.”

-“해태 지명까지 받았지만, 대학교 진학 뒤 부상과 부진으로 교사의 길 도전”

-“모든 학생선수가 스포트라이트 받는 스타선수 될 순 없어, 다른 길 바라볼 때도 필요”

-“‘부활동 개념’ 운동부로 변화 필요성, 학생선수들도 일반 학생들과 다르다는 인식 버려야”

-“교사로서 직접 필드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싶은 게 꿈, 모든 학생선수가 행복해질 수 있는 날이 오길”

해태 타이거즈의 신인 지명까지 받았던 김현율 교사는 선수 출신으로서 선생님이라는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해태 타이거즈의 신인 지명까지 받았던 김현율 교사는 선수 출신으로서 선생님이라는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엠스플뉴스=광진구]

9월 21일 야구 학생선수들에겐 수능 혹은 취업 최종 시험과도 같은 2021 KBO 신인 2차 드래프트가 열렸다. 2020년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 856명, 대학교 졸업 예정자 269명, 국외 아마 및 프로 출신 등 기타 선수 8명 등 총 1,133명 가운데 이날 10개 구단의 선택을 받은 이들은 총 100명이었다.

대략 10분의 1 확률로 코로나19 시즌 취업난을 뚫어낸 100명의 선수에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하지만, 선택받은 100명이 아닌 아쉬움 삼켜야 했던 나머지 1,033명의 지명 대상자는 대학 진학 혹은 제2의 길을 찾아야 한다.

야구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겪을 좌절은 차마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나마 고졸 선수들에겐 야구의 꿈을 이어갈 대학 진학이라는 선택지가 있지만, 대졸 선수들은 야구를 계속해야 할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기도 한다.

이처럼 화려한 야구의 삶이 아닌 좌절과 안타까운 야구의 삶을 살았던 이가 한 명 있다. 한 때 고교 야구 투수 유망주로서 신인 드래프트 지명까지 받았던 자양중학교 김현율 교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현율 교사는 고졸 프로 입단 대신 고려대학교로 진학해 야구를 이어갔지만, 부상과 부진 끝에 야구공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야구가 아닌 다른 길을 택하고자 결심했던 김현율 교사는 임용고사 5수 끝에 교사라는 새로운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질겼던 야구와의 연이 끊어진 것도 아니었다. 2020년 현재 김현율 교사는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자양중학교 야구부장 교사를 맡아 학생선수들을 지도 중이다. “야구만 인생의 정답이 아니다. 학생선수들이 일반 학생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라고 거듭 강조한 김현율 교사의 조언을 엠스플뉴스가 직접 들어봤다.

해태 3라운드 지명까지 받았던 유망주 투수 출신 김현율 교사

투수 출신인 김현율 교사는 야구 학생선수들을 지도하는 야구부장 교사를 맡아 학생선수들을 관리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투수 출신인 김현율 교사는 야구 학생선수들을 지도하는 야구부장 교사를 맡아 학생선수들을 관리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딱 봐도 체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웃음). 선수 출신으로서 프로팀 지명까지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9년에 2000년 KBO 신인 드래프트 대상자였습니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2차 3라운드 지명을 받았어요. 전체 18순위로 생각보다 꽤 높은 순서였습니다.

그런데 고졸 선수로서 프로 입단을 포기했습니다.

당시 전반적인 아마야구 분위기가 고졸 프로 입단보단 대학 진학을 대부분 선호하는 추세였습니다. 야구를 조금이라도 잘한다 싶으면 대학은 무조건 가는 거였죠. 저도 전혀 고민 없이 대학 진학을 택했습니다. 또 고려대학교는 체육교육과로 입학해 교원 자격증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지금 돌이켜도 전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었습니다.

지역에서 꽤 이름을 날린 유망주였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1981년생인데 야구부 유니폼이 멋있어 보여 중학교 1학년부터 야구부에 들어가 선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씨름 선수를 하셨고, 아버지와 형제분들도 운동부 경험이 있어 크게 반대하시진 않았어요. 마산중학교와 마산상고(현재 마산용마고)를 거쳐 야구부 생활을 이어갔죠.

포지션은 어디였습니까.

야구를 늦게 시작한 탓에 중학교 때는 당시 가장 못하는 선수가 들어가는 우익수 8번 타자였습니다(웃음). 그러다가 중학교 1학년 때 홈 보살을 시도하려고 송구했는데 너무 강하게 던져 백네트 위로 공이 넘어간 겁니다. 당시 감독님이 그걸 보시더니 너는 투수를 한 번 해보자고 해서 중학교 2학년 때 투수로 전향했죠.

이후 투수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됐군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신장 10cm가 더 커지고 힘도 붙어 구속과 제구 모두 향상됐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때 야구가 잘 풀렸으니까 대학교에 갔다가 프로에 도전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죠. 고려대학교도 정말 가고 싶은 학교였고요.

박용택·이택근·정근우와 함께했던 고려대 야구부 시절

고려대 시절 주축 투수였던 김현율 교사(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당시 포수였던 이택근 선수(오른쪽에서 두 번째)도 보인다(사진=김현율 교사 제공)
고려대 시절 주축 투수였던 김현율 교사(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당시 고려대 포수였던 이택근 선수(오른쪽에서 두 번째)도 보인다(사진=김현율 교사 제공)

대학 야구 무대는 생각과 달랐습니까.

저도 제 지역에선 꽤 야구를 한다는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대학교로 들어간 순간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느꼈죠. 당시 대학야구 수준이 정말 높았습니다. 대부분 청소년 국가대표 출신이었으니까요. 최희섭 선배는 제가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미국 무대로 진출하셨고요. 당시 같이 뛰었던 선수가 (박)용택이 형이랑 (이)택근이 형이었죠. (정)근우도 후배로 들어왔고요.

박용택, 이택근 선수와 함께 야구부 생활을 한 기억은 어떻습니까.

용택이 형은 2년 선배인데 그때도 열심히 야구만 하던 선배였습니다(웃음). 택근이 형은 1년 선배에다 당시 포수 포지션이라 배터리 호흡을 맞췄어요. 제가 대학교 3학년인 2002년에 처음 정기전 대회에 나갔는데 택근이 형과의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에피소드입니까.

저는 택근이 형의 타격은 인정해도 포수로 인정은 안 했습니다(웃음). 사인 때문에 많이 싸웠거든요. 정기전 때 2회부터 마운드에 올랐는데 택근이 형이 자기 사인대로만 던지라고 말해 ‘오늘은 내가 던지고 싶은 공을 던지고 싶다. 안타를 맞기 시작하면 형 사인대로 던지겠다’라고 답했어요. 그런데 그날 제가 2회부터 8회까지 1실점으로 잘 던지고 팀도 8대 3으로 승리했어요. 택근이 형도 그날 저를 인정해줬죠(웃음).

2002년 LG 트윈스에 입단한 신인이었던 박용택 선수도 기뻐했겠습니다.

그날 정기전에서 이기고 용택이 형한테 연락을 드렸습니다. 프로팀에서도 고대와 연대 출신 선수들끼리 정기전 결과를 놓고 내기를 하는 게 있더라고요. ‘제가 잘 던져 이겼습니다’라고 자랑하니까 ‘네 덕분에 술값이 많이 깨졌다’라며 웃으셨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졸업 시즌 직전 찾아온 팔꿈치 부상, 야구선수 김현율의 인생이 바뀌었다

야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대학교 졸업 시즌을 앞두고 겪은 팔꿈치 부상으로 김현율 교사는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사진=김현율 교사 제공)
야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대학교 졸업 시즌을 앞두고 겪은 팔꿈치 부상으로 김현율 교사는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사진=김현율 교사 제공)

그때만 해도 야구선수로서 성공의 길이 보였을 듯싶습니다. 어디서부터 다시 꼬이기 시작한 건지 궁금합니다.

2학년 때까지 방황하다가 3학년 때 겨우 정신 차리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런데 졸업 시즌을 앞두고 동계 훈련에서 탈이 났어요. 괌 전지훈련을 가기 전에 순천에서 일주일 정도 훈련을 했습니다. 그때 캐치볼과 하프 피칭 정도만 소화하면 되는데 제가 괜히 날씨가 따뜻하고 몸 상태도 좋아 불펜 투구를 소화했어요. 던지는 순간 팔꿈치에 ‘딱’하는 소리가 나며 전기가 오르는 기분이더라고요.

얘기만 들어도 정말 안타까운 순간입니다.

팔을 못 펼 정도였습니다. 제가 야구를 시작하고 크게 아픈 적이 없었는데 하필 가장 중요한 시즌을 앞두고 그런 일이 찾아온 거죠. 수술을 받으면 졸업 시즌을 아예 날려야 하니까 재활로 버텼어요. 결국, 가장 중요한 3월부터 8월 사이에 단 한 번 공을 던졌습니다. 당시 대학교 감독님(이종도 감독)이 부르시더니 ‘KIA에서 4년 전 너를 뽑았던 지명권을 포기했다’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렇게 됐으니 교사에 도전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교사의 꿈이 생긴 이유가 있었습니까.

체육교육과 소속이라 대학교 4학년 때 교생 실습을 나갔습니다. 그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재미있구나’라고 느꼈거든요. 예전에 학교생활을 제대로 못 했으니까 호기심도 많았고요. 교사를 직업으로 해도 괜찮겠다고 처음 느꼈던 거죠.

곧바로 임용고시에 도전한 겁니까.

(고갤 내저으며) 사실 야구 인생 마지막 도전이 있었습니다. LG 트윈스 구단에서 육성선수 입단 기회를 주셔서 그해 가을에 입단 테스트를 받고 호주 마무리 캠프까지 같이 떠났어요. 당시 마무리 캠프 멤버 가운데 (박)경수와 (우)규민이도 있었고요. 두 선수 모두 고졸 입단이라 대학교 생활에 대해 저에게 많이 물어본 기억이 납니다(웃음).

그래도 프로팀의 유니폼을 입었는데 다시 야구의 꿈을 접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느낀 좌절과 비슷했습니다. 실력 차가 더 크게 느껴진 거였죠. 팔 상태도 안 좋았는데 넘을 수 없는 벽을 직접 느끼니까 캠프 귀국 뒤에 바로 야구를 그만하겠다고 구단에 얘길 드렸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 야구를 아예 끊었습니다. 3~4년 정도는 야구 경기 자체도 보질 않았죠.

질겼던 야구와의 인연, 자양중 야구부장 교사로 이어지다

김현율 교사와 야구의 인연이 다시 이어진 자양중학교. 자양중 야구부장 교사 제안은 김현율 교사에겐 또다른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김현율 교사와 야구의 인연이 다시 이어진 자양중학교 야구부. 자양중 야구부장 교사 제안은 김현율 교사에겐 또다른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야구를 그만두는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시기인 듯싶습니다. 그 절망의 순간 가장 도움이 됐던 조언이 있습니까.

당시 대학교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으셨던 한영준 코치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현율아, 모든 운동선수는 은퇴해야 하는데 너는 그 시기가 조금 빨리 왔을 뿐이다. 10년 뒤 고민해야 할 은퇴 뒤 삶을 너는 더 일찍 시작하는 거로 생각해라. 오히려 10년 뒤 네가 다른 친구들보다 더 앞서 있을 수 있다. 새로운 길에 도전해야 하니까 그만큼 네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요. 임용고시라는 새로운 길에 도전하는 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습니다.

임용고시 5수 끝에 합격은 과정이 험난했음을 보여주는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2005년부터 시작해 5번의 시험을 보고 2009년에야 합격증을 받았습니다. 운동하신 분들은 공감할 텐데 장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처음엔 30분도 못 앉았는데 점점 시간을 늘려갔습니다. 두꺼운 원서를 하나씩 다 스스로 읽고 공부했습니다. 스터디 그룹 발표도 하며 학원도 다니니까 고시 3년째 정도에 서서히 머릿속에 내용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5수 끝 합격의 순간이 또 인생의 전환점이었겠습니다.

4번째 임용고시 도전 때 최종 시험에서 0.06점 차이로 떨어졌습니다. 그때 멘탈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포기해야 할까 싶은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 시험이라 생각하고 서울 지역에 원서를 썼습니다. 최종 시험까지 느낌이 좋았어요. 온라인 합격 발표 때 합격이면 파란색으로 글씨가 뜨니까 파란색 옷을 입고 기다렸죠(웃음). 합격이 뜨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당당히 합격 소식을 알렸죠. 야구선수로서 성공해 부모님에게 보답하지 못한 응어리가 있었으니까요.

야구와 공부 가운데 무엇이 더 힘들었습니까.

그런 질문을 던지는 분들이 많으신데 저는 야구가 훨씬 더 힘들었습니다. 야구에선 투수와 타자는 365일 내내 타자들의 방망이에 안타를 안 맞으려고 혹은 투수의 공을 안타로 때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1년 내내 그렇게 사람들이 서로 이기려고 싸우는데 얼마나 박 터지고 힘들까요. 그런데 공부를 하면 책이랑 싸워야 합니다. 책을 넘어뜨리려고 노력하면 언젠간 반드시 넘어뜨릴 수 있더라고요. 밤새 책을 들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기더라고요(웃음).

‘교사’라는 새로운 길에 들어섰음에도 야구와 인연은 질겼습니다. 야구부장 교사를 맡은 계기도 궁금합니다.

처음 발령받은 학교가 중화중학교였는데 거기선 태권도부장 교사를 8년 동안 맡았습니다. 그러다가 야구선수 출신이니까 야구부를 한 번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어요. 아무래도 제가 그동안 걸어온 길이 있으니까 학생선수들에게 반드시 야구만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학생선수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도 운동이 아닌 다른 길도 준비할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죠. 그래서 2017년 3월부터 자양중 야구부장 교사를 맡아 계속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모든 학생선수가 스포트라이트 받는 스타선수 될 순 없어, 다른 길 바라볼 때도 필요”

프로 무대 진출한 자양중 출신 선수들. 수많은 학생선수는 걸개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질 날을 고대하며 땀을 흘리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프로 무대 진출한 자양중 출신 선수들. 수많은 학생선수는 이렇게 걸개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질 날을 고대하며 땀을 흘리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야구부장 교사로서 학생선수 학부모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언론에서 나오는 기사들에 환상을 느끼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거기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 선수들의 기사를 보고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도 무조건 저렇게 될 수 있단 생각을 해요. 언론에 나오지 않는 수많은 무명 선수는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프로 무대에 못 간 나머지 선수들이 무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굳이 야구가 아니더라도 다른 길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학생선수들도 그런 부분을 잘 인지해야겠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게 ‘친구들을 최대한 많이 사귀어라’라고 말합니다. 운동부 친구들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도 얘길 해야 다른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어요. 운동부 친구들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시야가 그 안에서 갇히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학생선수들도 운동장에 나갔을 때만 ‘야구 선수’입니다. 학교 안에선 그냥 일반 학생과 똑같아요. 자신이 특별한 존재고 일반 학생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제가 일본 학생야구에서도 느낀 점이 많았는데요.

일본 학생야구요?

야구부장 교사 부임 뒤 해마다 일본 고시엔 야구대회를 보러 갔습니다. 거기서 학생 운동부 시스템을 살펴보기도 했고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한 일본 학생선수가 자신의 꿈을 ‘우리 학교의 고시엔 우승’ 그다음으로 ‘변호사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더군요. 당연히 프로 무대 진출이 꿈일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이 정말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학교 운동부 시스템도 이제 ‘부활동’ 개념으로 가야 하지 않나 싶어요.

어떤 개념일까요.

엘리트 운동부로 따로 분리하는 게 아니라 모든 스포츠 종목에 부활동 개념으로 참가하는 학생 인원을 늘리는 겁니다. 지금은 엘리트 운동부 학생과 일반 학생 두 가지 방향 가운데 하나에 올인해야 한다는 인식이잖아요. 부활동식으로 부담 없이 스포츠 활동을 할 수 있다면 저는 재능 있는 선수들이 더 많이 나타날 거로 믿습니다.

음.

스포츠에 참여하는 학생선수 저변을 확대하고, 중간에 다른 길로도 쉽게 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거죠. 한국 특기자 제도 아래서는 ‘저 친구는 운동부 선수니까’라는 시선을 받게 돼요. 학생이면 같은 학생이지 않나요. 그런 걸 없앴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모든 학생선수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김현율 교사 "성공한 1명 말고도 나머지 9명의 삶도 소중하니까"

김현율 교사는 향후 자신이 직접 필드에서 학생선수들과 호흡을 맞춰 뛰고 가르치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김현율 교사는 향후 자신이 직접 필드에서 학생선수들과 호흡을 맞춰 뛰고 가르치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체육교사로서 더 이루고 싶은 개인적인 꿈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현재 야구부장 교사를 하면 아무래도 외부에서 지도자를 데려오고 행정이나 생활 관리에만 집중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제가 직접 필드로 나가 감독교사로서 학생선수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주는 역할을 하고 싶은 꿈이 있어요. 현재 서울 세현고등학교에선 서울대 선수 출신 교사께서 야구부장을 맡으며 직접 운동 지도까지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학생선수들과 같이 땀을 흘리고 같이 파이팅을 외치고 싶은 거죠. 또 학생선수 누군가가 저를 보고 교사의 꿈을 키우게 된다면 더 좋을 듯싶고요(웃음).

야구만 보고 달려가는 학생선수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습니까.

학생선수들이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자신 스스로가 이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가장 먼저 깨달아요. 냉정한 얘기일 수 있지만, 그렇게 느낀 순간 다른 길을 택하는 것도 인생에서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야구를 등한시하라는 뜻은 아니에요. 현재 하는 야구에 최선을 다하되 한계를 느꼈을 때 다른 길도 미리 준비하고 알아보는 걸 추천합니다. 제가 그 한계를 느껴봤기에 할 수 있는 조언입니다. 10명 가운데 1명이 성공할까 말까 하는 확률 속에서 나머지 9명이 앞으로 살아갈 삶도 소중하니까요.

그토록 인연을 끊고자 했던 야구인데 그 인연이 질기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현율 교사에게 야구란 무슨 의미일지 궁금합니다.

제가 임용고시 객관식 시험에서 ‘전국체육대회의 시초가 된 대회는?’라는 문제를 풀었습니다. 사실 잘 몰라서 처음엔 ‘전조선야구대회’라는 답을 찍었는데 나중에 야구 때문에 인생을 망쳤으니까 답을 바꾸자고 생각해 ‘전조선정구대회’로 바꿨어요. 그런데 정답이 전조선야구대회더라고요(웃음).

야구가 오죽 싫었으면 그랬을까요(웃음).

진짜 그 정도로 야구가 싫었는데 어느새 결국 야구와 다시 인연을 맺었습니다. 결국, 야구는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떠나려고 해도 결국 다시 뒤돌아보고 야구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비록 야구선수로서 어릴 적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또 다른 학생선수의 꿈을 도와줄 수 있도록 밑에서 조용히 노력하려고요. 모든 학생선수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이 오길 기대합니다.

김근한 기자 kimgernhan@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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