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도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야구계 폭력 문제

-피해자가 문제다, 훈육 차원이다…가해자 옹호하는 논리도 여전해

-‘선배가 얼차려 준 게 뭐가 문제냐’ 팬들도 폭력에 둔감

-어떤 형태로도,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기준 세워야

2020년에도 여전한 야구계 폭력 문제(사진=엠스플뉴스)
2020년에도 여전한 야구계 폭력 문제(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

요즘은 해가 가면 갈수록 선후배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 옛날 같으면 후배가 선배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 예의는 지켰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애들이 있다. 후배가 기어 올라와도 선배가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나.

최근 논란이 된 대구지역 고교 야구부 선수단 폭력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해당 야구부 감독이 들려준 말이다. 이 감독은 ‘폭력은 있어선 안 된다’면서도 가해 학생 선수를 감싸고, 피해를 입은 후배 학생 선수들의 ‘예의’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야구부 감독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학교 교감 역시 “선배들이 나름대로 운동부 특유의 규율을 세우려는 차원에서 그런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며 운동부의 특수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 학교에선 운동부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야구부 선후배 간 폭력을 일반 학생들 간 사소한 다툼에나 적용하는 ‘학교장 자체해결’로 처리했다.

SK 와이번스 퓨처스팀(2군) 폭력 사건이 처음 알려졌을 때 SK 관계자가 보인 반응도 비슷했다. 당시 SK 관계자는 “후배 선수들의 일탈 행위가 있었고, 일탈한 후배들을 선배가 훈육하는 과정에 감정 조절을 못 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했다. 원래 맞은 선수의 행실에 문제가 있었다, 선배 선수가 착한 선수라는 설명도 보탰다.

피해자가 ‘무례’해서 가해자가 ‘규율’을 세우려 불가피하게 ‘물리적 압박’을 가했다. 맞은 사람도 책임이 있다. 맞을 만 해서 맞았다. 때린 사람이 원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운동부 폭력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기적의 논리다.

이런 핑계는 가해자의 책임을 줄이고, 피해자의 책임을 키운다. 벌어진 폭력 행위에 불필요한 ‘사연’을 첨가하고 정상 참작의 여지를 만든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맞을 짓’이란 것을 존재하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어떤 경우에도 있어선 안 될 폭력을 정당화하고, 멈춰야 할 폭력의 수레바퀴가 계속 돌아가게 한다.

‘착한 폭력’엔 팬들도 관대…맞을만한 짓을 해서 맞았다?

최근 대구지역, 부산지역 야구부 폭력 사건이 논란이다(사진=MBC)
최근 대구지역, 부산지역 야구부 폭력 사건이 논란이다(사진=MBC)

세상에 ‘맞을 짓’이 존재한다는 착각은 운동선수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처음 SK 퓨처스팀 사건이 알려진 뒤 이를 보도한 기사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술X먹고 무면허 음주운전하고 새벽에 기어들어 온 X 얼차려 안주면 그게 선배냐? 진짜 아무리 군대도 X판되었다지만 운동선수들끼리 그 정도 기강도 못 잡나? 게다가 얼차려에 발끈한 X 있으면 나 같아도 손부터 나가겠다.

이 댓글은 8월 1일 현재 총 7416명의 ‘좋아요’를 받았고, ‘싫어요’를 누른 사람은 420명에 불과했다. 사회적 시선과 체면 때문에 실제 세계에선 대놓고 드러내지 못하는 속내를 숨김없이 표출하는 인터넷 공간의 특성을 감안해도, 이용자들의 반응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크게 기운 것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술 먹고 면허도 없이 운전대 잡고 규율까지 위반했는데 얼차려가 다행이지 XX 맞았어도 할 말 없음 ㅋㅋ’이란 댓글, ‘무단이탈 무면허 음주하고 선배가 얼차려 준 게 그렇게 억울해서 폭로까지 하느냐? 진짜 싹수 누런 X이네 방출해라’란 댓글도 많은 추천을 받았다. 맞을 짓을 했으면 때려도 된다는 사고가 운동부 울타리 바깥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KBO 상벌위원회 징계가 발표된 뒤에도 팬들 사이에선 ‘음주-무면허 선수와 훈육한 선배가 똑같은 징계(30경기 출전정지)를 받는 게 말이 되느냐’며 선배 선수들을 감싸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투수 정영일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얼차려’에 대해서도 팬들의 반응이 엇갈린다. 일각에선 팀 스포츠 특성상 ‘얼차려’까지 문제 삼는 건 지나치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별것 아닌 일’로 생각하는 얼차려는 사실 대표적인 시대착오적 악습이자 군사주의 문화의 잔재다. 얼차려의 사전적 의미는 ‘군의 기율을 바로잡기 위하여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비폭력적 방법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일’이다. 사회가 아닌 군대에서나 통용되는 행위라는 얘기다.

프로야구팀은 군대가 아닌 직장이다. 감독과 코치는 엄밀히 말해 교사가 아닌 직장 상사고, 선배 선수는 군대 선임병이 아닌 직장 동료다. 요즘 같은 때 직장이나 학교에서 ‘얼차려’를 줬다간 큰일이 난다. 가혹 행위로 고발하면 법적 제재를 피하기 어렵다. 다 똑같이 월급 받고 개인사업자로 일하는 프로야구팀에서도 당연히 마찬가지 잣대가 적용돼야 한다.

‘착한 폭력’은 없다…시스템 통해 사전에 문제 예방해야

SK 퓨처스팀 사태는 시스템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사진=엠스플뉴스)
SK 퓨처스팀 사태는 시스템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사진=엠스플뉴스)

끝나지 않는 폭력의 악순환을 멈추려면 지도자들부터 선수, 구단, 팬들까지 폭력을 바라보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 이는 어떤 경우에도, 어떤 형태로도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기준을 세우는 데서 시작한다.

우선 지도자들부터 달라져야 한다. 운동부 선수 간 폭력은 자세히 살펴보면 대개 감독과 코치로부터 내려오는 ‘대물림 폭력’인 경우가 많다. 감독이 코치에게 압박을 가하고, 코치가 선배들을 압박하고, 여기에 시달린 선배 선수들이 후배들에게 물리력을 가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폭력이나 체벌 없이는 선수들을 휘어잡기 어렵다는 건 핑계다. 때리고 욕해서 선수를 제압하는 건 전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감독 같은 무능력자들의 방식이다. 영화 ‘4등’에서 술과 도박에 빠진 무능한 수영코치는 “하기 싫고 도망가고 싶을 때 잡아주고 때려주는 선생이 진짜다. 내가 겪어보니 그렇다”며 초등학생 선수를 빗자루로 두들겨 팬다.

트레이 힐만 감독이나 맷 윌리엄스 감독이 언제 원산폭격으로 리더십을 세웠던가. 선수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잠재력을 끌어내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고 능력이다. 때리고 벌주지 않아도 선수들이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게 ‘전문가’로서 감독과 코치가 할 일이다. 그걸 못하면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이다. 그런 지도자가 있다면 퇴출해야 한다.

꼭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과 몽둥이질을 해야만 폭력이란 생각도 바꿔야 한다. 아마추어 야구부나 프로팀 더그아웃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배트 노브로 가슴을 치는 행위, 머리나 허벅지를 툭툭 치는 행위도 엄연한 폭력이다. KBO 관계자는폭력은 단순히 손찌검이나 도구를 사용한 직접적인 폭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언어폭력이나 얼차려 등 상대의 의사에 반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는 모든 행위가 폭력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선배가 후배를 물리력까지 써가며 ‘훈육’할 이유도 없다. 인성 교육과 사회성 교육은 가정과 학교의 몫이지 야구부나 프로야구 팀에서 할 일이 아니다. 인성에 문제가 있는 선수는 실력이 좋아도 안 뽑으면 된다. 물의를 빚은 선수는 팀과 리그에서 정한 규정에 따라 조치하면 그만이다.

선배에게 불손한 행동을 하면 내규대로 처리하면 된다. 팀 분위기를 흐리면 다른 팀으로 보내면 된다. 시스템이 제 할 일을 하면 자기 운동하기 바쁜 선배가 후배에게 굳이 얼굴을 붉힐 일이 없다. 정상적인 시스템 속에서 각자 열심히 운동하면 팀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반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SK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 SK는 문제 선수를 ‘재능이 아깝다’는 이유로 사전에 걸러내지 않았다. 육성팀 관리자와 코칭스태프는 후배 선수 관리 책임을 선배 선수 개인에게 맡겼다. 반복적인 숙소 무단 이탈과 문제 행동에도 원칙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사고가 터진 뒤엔 ‘선수 장래를 생각해서’ 내부적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시스템이 단계별로 오류를 일으킨 결과, 선수 6명이 무더기 징계를 받는 참사로 이어졌다. 구타 등 강도 높은 폭력은 오래전에 몰아냈지만, 여전히 ‘착한 폭력’에는 관대했던 야구계에 SK 사태는 반면교사다. 세상에 가벼운 폭력, 그래도 되는 폭력, 착한 폭력은 없다. 오직 ‘폭력’만이 있을 뿐이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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