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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헌의 브러시백] 프로야구판 ‘히든 피겨스’…여성 프런트의 어제와 오늘

  • 기사입력 2020.04.09 10:56:34   |   최종수정 2020.04.09 11: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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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히든 피겨스’처럼 KBO리그에서 활약한 여성 프런트의 역사

-1980년대에는 단순 경리 업무…2000년대 들어 홍보팀 진출

-홍보 업무 시작으로 마케팅팀장 배출, 이제는 데이터 분석가도 탄생

-남은 영역은 운영팀…현실판 이세영 팀장, 나올 수 있을까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30대 여성 운영팀장으로 등장한 이세영 운영팀장(사진=SBS)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30대 여성 운영팀장으로 등장한 이세영 운영팀장(사진=SBS)

 

[엠스플뉴스]

 

2017년 개봉작 ‘히든 피겨스’는 달 착륙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던 성별・인종 유리 천장을 흑인 여성들이 깨뜨리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1960년대,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 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당시 NASA(미 항공우주국)에서 활약한 세 천재 여성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저마다 뛰어난 두뇌와 능력을 지녔지만 첫 출근날 청소부 취급을 받고, 10년을 일하고도 승진에서 탈락하고, 백인 남성이 아니란 이유로 엔지니어 직에서 배제된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건물 화장실도 쓰지 못한다. 다른 건물 화장실까지 매일 1.6km/h를 왕복하는 수모를 겪는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엄연히 ‘실화’다.

 

한때 백인 남성들만 가득했던 NASA처럼, KBO리그 역시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무대로 남아 있었다. 한 원로 야구인은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여성 직원이 요즘처럼 자유롭게 더그아웃을 드나들기 어려웠다. 여자가 다녀가면 재수 없다고 소금을 뿌리는 직원도 있었다야구장에서 지금처럼 여성 프런트가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 들어 생긴 변화라고 설명했다. 

 

이런 변화가 있기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성 프런트로 활약한 ‘숨겨진 인물들(히든 피겨스)’이 있었다. 차별과 편견, 강고한 ‘유리 천장’을 야구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이겨낸 여성 프런트의 역사를 살펴봤다.

 

초창기 프로야구, 여성 프런트는 단순 경리 업무…2000년대 후반부터 홍보팀 활약

 

백인 남성 위주의 NASA에서 흑인 여성들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히든 피겨스.

백인 남성 위주의 NASA에서 흑인 여성들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히든 피겨스.

 

‘여성 프런트’는 한국 프로야구 출범 초기부터 존재했다. 두산(전 OB) 베어스 창단 멤버인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은 “1980년대 초반에도 구단마다 서너 명 정도의 여성 직원이 있었다”고 했다.

 

여직원들은 대개 ‘경리’ 업무를 맡았다. 구 총장은 요즘처럼 홍보 업무를 맡거나 선수단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각 구단 부서별로 경리 일을 담당하는 여직원이 하나씩 있었고, 경리가 아니면 비서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떠올렸다. 

 

2000년대 초까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구 총장은 “내 기억으로 야구계에서 여성이 홍보 업무를 맡은 건 KBO 남정연 현 홍보팀장이 처음”이라고 했다. 남 팀장은 2001년 KBO에 입사해 2003년부터 홍보팀 일을 시작했다. 

 

여성 직원이 경기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을 하는 건 ‘장내 아나운서’ 정도였다. 두산 베어스 홍보팀 김지영 과장은 경영지원팀 재무담당으로, 키움 히어로즈 사회공헌사업 담당 김은실 과장은 관리지원팀 비서로 각각 입사해 장내 아나운서로 영역을 넓혔다. 1997년 입사한 두산 김지영 과장은 현 KBO리그 최장수 여성 프런트로 알려졌다.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기업은 대부분 보수적인 대기업입니다. 그러다 보니 야구단 문화도 자연히 보수적인 그룹 문화를 따라갔습니다. 2000년대 초까지도 여직원이 더그아웃에 들어오면 부정 탄다고 말하는 현장 지도자가 있었고, 실제로 소금을 뿌리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한 야구 원로의 말이다.

 

수도권 구단 관계자는 “2000년대 초까지 구단 내부에 ‘여직원은 더그아웃, 그라운드에 절대 내려오면 안 된다’ ‘결혼하면 퇴사해야 한다’는 정서가 강했다. 부서마다 한두 명씩 여직원은 있었지만, 대부분 사무실 안에서만 일했고 야구장을 밟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유교리그 문화에 변화가 생긴 건 2000년대 후반, 스포츠 전문 방송사 소속 여성 아나운서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여성 아나운서들의 종횡무진 활약으로 그라운드에 존재했던 보이지 않는 벽에 조금씩 균열이 생겼다. 낯선 타자의 등장에 처음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던 선수들, 감독들도 매일 야구장에서 여성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었다.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등 젊은 신생 구단도 변화를 주도했다. ‘야구 전문기업’ 넥센은 대기업 산하 기존 야구단보다 모든 면에서 유연했다. 구단 수뇌부와 팀장급 인사들은 여성 직원에게 다른 구단에선 주지 않았던 다양한 일을 맡겼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힘을 실어줬다. 

 

키움 출신 야구인은 여성 직원이 더그아웃에 들어와 직접 수훈선수 멘트를 받거나, 국외 스프링캠프 출장까지 함께한 건 김은실 과장이 최초일 것이라며베테랑 선수들을 중심으로 여성 프런트를 깍듯하게 대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친한 사이라도 반드시 직급으로 부르고 경어를 사용하게 했다고 전했다.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구단 홍보팀과 마케팅팀에 여성 프런트가 근무하고 있다. 키움과 NC 마케팅 관련 부서에선 여성 팀장도 나왔다. KBO에서도 2018년 역대 최초 여성 홍보팀장이 탄생했다. 최장수 여성 프런트 두산 김지영 과장은 이제 홍보팀으로 자릴 옮겨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구경백 총장은 “김 과장은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남편이 언론계에 종사하고 있어 기자들의 협조를 잘 이끌어낸다는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여기서 생기는 궁금증 하나. 그렇다면 여성 기자가 야구장에서 활동을 시작한 건 언제부터일까. 한 야구 원로는 “1990년 일간스포츠 체육 2부에서 OB 베어스를 담당한 이윤정 기자가 최초의 여성 야구기자”라고 증언했다. 이 전 기자는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으로 체육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후 1995년 스포츠서울 조현정 기자(현 부국장)를 비롯해 스포츠 매체에서 야구를 담당하는 여성 기자가 하나둘씩 등장했다. 

 

다른 야구 원로는 “홍윤우(홍희정) 기자가 1990년대 중반 평화방송 아나운서로 야구장에 모습을 보였다. 홍 기자는 1990년대 후반 700 서비스 방송에서 야구장 현장 소식을 전하는 일도 했었다”고 전했다. 홍 기자는 현재 아마야구와 퓨처스리그 전문기자로 활약 중이다. 

 

“여성은 운영팀 업무 불가? 벽은 언젠가는 무너지게 돼 있다”

 

보스턴 레드삭스 라켈 페레이라 부사장, 현재는 MLB 사무국 소속인 킴 응 전 LA 다저스 부단장.

보스턴 레드삭스 라켈 페레이라 부사장, 현재는 MLB 사무국 소속인 킴 응 전 LA 다저스 부단장.

 

한때 ‘금녀의 공간’이었던 야구장의 분위기가 최근 10년 동안 크게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은 남아 있다. 

 

수도권 구단 관계자는 여전히 승진, 연봉 등에서 여성 프런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어도 여성 프런트의 승진이 남성 직원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린다는 설명이다. 

 

메이저리그엔 LA 다저스 부단장까지 올라간 킴 응(현 MLB 사무국 소속), 보스턴 레드삭스 라켈 페레이라 수석 부사장 등 여성 임원이 적지 않다. 그러나 KBO리그에선 임은주 키움 부사장이란 예외적 사례를 빼고는 여성 프런트의 임원 승진까지는 갈 길이 멀다.

 

여성 프런트를 ‘프로페셔널’로 대하지 않는 문화도 여전하다. 한 지방구단 관계자는 “구단 여직원 사이에서 ‘선수는 왕족, 선수 출신은 귀족, 여성 프런트는 불가촉 천민’이란 자조 섞인 이야기를 나눈다”며 “프런트에게 깍듯하게 대하기로 알려진 선수가 여성 프런트에겐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고 했다. 

 

다른 야구 관계자는 “같은 브리핑도 남자 직원이 했을 때는 브리핑 내용을 갖고 얘기하지만, 여성 직원이 하면 그날 입은 옷이나 외모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여성 직원 중에 누가 예쁘다, 누가 못생겼다 같은 ‘얼평’도 심하고, 사생활을 재미삼아 소문으로 퍼뜨리는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키움 히어로즈의 경우 구단과 선수단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문화를 바꾸는 데 성공한 사례다. 키움 출신 야구인은 “처음 홍보팀에 여성 직원이 합류했을 때 선수들 중에는 ‘누나’라고 부르거나, 일 얘기를 하는데 장난치고 농담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구단에서도 선수단에게 요청하고, 선수단에서도 베테랑 선수들이 주의를 주고 모범을 보이면서 여성 프런트를 존중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여성은 현장 일을 못 한다”는 편견도 여전하다. 한 단장 출신 야구인은 드라마 ‘스토브리그’ 얘길 하다가 “드라마에서 제일 비현실적인 설정은 30대 여성 운영팀장”이라며 “선수단과 밀접하게 일하는 운영팀장은 여성이 하기 어렵다. 앞으로도 여성 운영팀장이 나오긴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구경백 총장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구 총장은 남자 직원과 비교해 라커룸에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없다는 건 핸디캡이 될 수 있다면서도지금은 많은 게 통용되는 시대 아닌가. 나중에는 운영 일도 하게 될 거라고 본다고 내다봤다. 

 

한 지방구단 관계자는 “여성이 운영팀 일을 못 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편견일 뿐”이라며 “여자농구 등 여자 종목을 보면 남자 감독, 남자 코치, 남자 직원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남자라서 불편하다거나, 남자는 여자 종목 일을 못한다는 소리가 나오진 않는다. 간단한 이야기”라고 꼬집었다.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영화 ‘히든 피겨스’의 시놉시스 문구다. 너무 오래돼서 벽처럼 보이는 유리천장도 계속 부딪히다보면 언젠가는 깨지는 날이 온다. “결국 성별의 벽은 조금씩 무너지게 돼 있다.” 프로야구 탄생부터 39년을 지켜본 구경백 총장의 통찰이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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