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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2

농구

[이근승의 박스아웃] NCAA 1호 최진수 “미국 도전은 성공이나 실패로 나눌 수 없다”

  • 기사입력 2019.09.17 10:09:06   |   최종수정 2019.09.17 1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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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NCAA 디비전 1 등록 선수 최진수, 동양인으론 역대 다섯 번째 기록   

-중학교 시절 아마추어 농구계 평정···“2학년 때 미국에서 스카우트 제의받고 1년간 고민”

-“200cm 이상 선수들이 내·외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어 매우 놀랐다”

-“미국 유학 시절 대한민국농구협회와 갈등 잦았다”

-“미국 도전은 성공이나 실패로 나눌 수 없어”···“새 도전 앞둔 현중이를 비롯한 후배들에 응원과 격려 아끼지 않았으면”

 

한국인 최초 NCAA 디비전 1을 경험한 최진수(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인 최초 NCAA 디비전 1을 경험한 최진수(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고양]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장신 포워드 최진수는 한국 최초 NCAA(전미대학체육협회) 디비전 1에 등록된 농구 선수다. 동양인으론 역대 다섯 번째다. 

 

최진수는 중학교 시절부터 아마추어 농구계를 평정했다. 200cm 키에 빠른 발을 갖췄고 점프력이 상당했다. 적수가 없었다. 그런 최진수가 선택한 건 미국 유학이었다. 한국에 있으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는 까닭에 주변의 반대가 심했지만, 더 큰 무대에서 꿈을 펼치고 싶은 욕심을 이길 순 없었다. 

 

미국 사우스켄트 고등학교에 진학해 기량을 갈고닦은 최진수는 2008년 농구 명문 메릴랜드 대학 입학에 성공했다. 첫해 평균 6.5분 출전 1.6득점, 1.1리바운드란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프로농구(NBA)에 근접한 선수가 넘치는 미국 대학 농구는 만만한 무대가 아니었다.

 

최진수는 대학 2학년 재학 중 한국 복귀를 선택했다. 주전 경쟁에서 밀린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학업과의 병행이 쉽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2011년 22살의 어린 나이에 KBL(한국프로농구) 신인선수 드래프트에 참여한 최진수는 1라운드 3순위로 오리온에 입단했다. 

 

최진수는 첫 시즌부터 정규리그 54경기를 모두 뛰며 경기당 평균 14.4득점, 4.8리바운드, 1.2어시스트를 올렸다. 어깨 부상으로 2년 차 시즌부터 저조한 기록을 남겼지만 병역을 마치고 돌아온 뒤 부활에 성공했다. 지난 시즌엔 51경기에서 뛰며 평균 13.6득점, 5.3리바운드, 1.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데뷔 시즌 못잖은 활약상을 남겼다. 

 

내·외곽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최진수는 미국으로 도전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자신은 보잘것없는 센터로 남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엠스플뉴스가 새 시즌 준비에 한창인 최진수를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최진수 “형들이 ‘네 전성기는 중학교 때’라고 합니다”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최진수(사진 왼쪽)(사진=KBL)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최진수(사진 왼쪽)(사진=KBL)

  

어릴 적부터 한국 최고의 선수가 될 재목으로 불렸습니다. 농구와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됐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습니다(웃음). 공부와는 인연이 깊지 않았어요. 책만 보면 졸음이 쏟아졌죠. 어릴 적부터 키가 컸던 까닭에 스카우트 제의가 많았어요. 축구 골키퍼 하란 분이 계셨고, 배구의 길로 인도하려고 했던 분도 있었죠. 하지만, 최종 선택은 농구였습니다. 

 

많은 종목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농구를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새 아버지께서 농구를 하셨어요. 자연스럽게 농구를 접할 기회가 많았죠. 하지만, 정식 운동부에 들어가기까진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부모님께서 운동선수의 삶이 힘든 걸 잘 아는 까닭에 ‘죽어도 안 된다’고 하셨죠.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한 가지 약속을 하고서야 농구 선수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어떤 약속을 했습니까.  

 

‘네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한다면 운동선수의 길을 허락한다’고 하셨죠. 또 하나의 조건은 공부였습니다. ‘학생은 공부가 최우선’이란 말씀을 하시면서 운동과 학업을 병행할 것을 요구하셨죠(웃음). 당시엔 농구가 아주 좋았던 까닭에 고민 없이 오케이 했습니다. 후회하는 데 얼마 걸리진 않았지만...

 

후회요?

 

농구부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이걸 왜 했지’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침 7시 30분까지 등교해서 오전 운동하고 9시부터 수업을 들었습니다. 수업이 끝난 3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진 오후 운동을 했죠. 더 늦게 끝나는 날이 많았습니다. 운동이 힘든 게 가장 힘들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 것도 아쉬웠어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운동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 공부를 했습니다. 새벽에 잠드는 날이 아주 많았죠. 농구부에 들어간 이후 평범한 아이처럼 방과 후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본 기억이 없어요. 학창 시절 소풍을 가본 기억이 없죠. 학창 시절 추억을 남기지 못한 게 아쉬워요. 평생 한 번뿐인 순간인데 농구와 공부에만 매진했죠. 

 

17살이던 2006년 WBC(월드 바스켓볼 챌린지)를 앞둔 한국 농구 대표팀에 뽑혔습니다. 최연소 발탁 기록이었죠.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건 언제부터입니까. 

 

초교 시절엔 키의 장점을 살린 선수였어요(웃음). 일찍이 키가 컸기 때문에 농구를 하는 데 유리한 점이 많았죠.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중학교 때부터였습니다. 키가 200cm에 육박했고 잘 뛰었으며 점프까지 높았죠. 적수가 없었어요. 형들이 가끔 이런 얘길 합니다. ‘네 전성기는 중학교 때’라고. 미국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도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한국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겁니까.

 

전국에 있는 중학교에서 손에 꼽히는 몇 선수를 뽑아 미국 아디다스 캠프에 갔습니다. 농구가 생각한 대로 잘 됐어요. 슛은 던지는 족족 림을 갈랐고, 패스와 리바운드 등도 마음먹은 대로 잡아냈죠. 그때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겁니다. 1년 동안 고민했어요. 낯선 타지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었죠. 

 

결론은 미국 진출이었습니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아디다스 캠프에 2008-2009시즌부터 10년 넘게 NBA 코트를 누빈 마이클 비즐리가 참석해 MVP를 받았어요. 둘째 날부터 캠프에 참여했는데 차원이 달랐죠. 만화에서나 볼법한 플레이를 연달아서 해내는 데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그때 다짐했어요. ‘미국에서 저런 친구들과 경쟁하면 더 재밌겠다. 한 번 해보자’고. 하지만, 당시 주변의 반대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반대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한국에서 성장하면 농구계의 주목을 독차지하며 프로에 진출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하느냐는 거였죠. 지금도 주위에서 이런 말을 하는 분이 계십니다. ‘네가 미국으로 가서 안 좋게 된 케이스’라고. 결과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내 생각은 완전히 다릅니다. 미국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최진수는 없었을 거예요. 

 

지금의 최진수는 없다?  

 

한국에서 농구를 배운 중학교 3학년 때까지 3점슛을 쏴본 적이 없었어요. 농구를 시작한 이후 쭉 센터 포지션만 소화했죠. 미국에 가보니 신세계였습니다. 나보다 큰 키를 가진 선수들이 내·외곽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거예요. 2m 넘는 선수가 3점슛을 쏴도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큰 충격이었죠. 

 

현재의 최진수는 내·외곽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장신 포워드입니다. 

 

미국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유니폼을 벗는 날까지 센터 포지션만 소화했을 겁니다. 그렇게 성장했다면 KBL 외국인 선수에 밀려 평균 이하의 선수로 남았을 거예요. 솔직히 외국인 선수와 1:1로 골밑 경쟁을 벌이기는 어렵습니다. 현실이에요. (서)장훈이 형이나 (김)주성이 형은 정말 대단한 겁니다. 그런 특별한 선수를 제외하곤 서양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내·외곽을 넘나들 수 있어야 해요. 그걸 미국에서 깨우치고 배운 거죠. 

 

성장을 위해 선택한 미국 유학, 틀에 박힌 농구에서 벗어나다 

 

레이업을 시도하는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최진수(사진=KBL)

레이업을 시도하는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최진수(사진=KBL)

  

삼일중학교 졸업 후 미국 사우스켄트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농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내가 왜 미국 유학을 선택했을까’란 후회를 매일 했습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부모님이 보고 싶었고 한국에서 매일 먹던 밥이 그리웠죠. 영어가 부족했던 까닭에 친구를 사귀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농구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죽을 맛이었죠(웃음). 

 

농구를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 

 

한국에선 센터 포지션을 소화했지만 미국에선 어림없는 소리죠. 2m 이상 선수가 가드 포지션을 보는 곳이 미국이에요(웃음).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한 외곽슛과 수비를 익히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미국은 포지션에 국한되지 않고 농구를 하는 곳이기도 해요. 4번(파워 포워드)이나 5번(센터) 선수가 외곽으로 나와 슛을 쏘는 게 자연스럽죠. 틀에 박힌 농구가 아니었습니다. 

 

언어부터 농구까지 배워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가장 힘든 건 인종차별이었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심했어요(웃음). 미국 농구계에선 아시아 선수가 아주 생소합니다. 학교 내에서도 1~3부로 나누어져요. 아시아 선수는 잘해야 2부, 보통은 3부 소속이죠. 그런데 처음 보는 아시아 선수가 장학금 받고 농구를 한다니까 그 친구들 입장에선 어이가 없었던 겁니다. 완전히 무시당했죠.

 

야오밍처럼 NBA에서 성공한 선수가 있는데도 동양인은 인정하지 않은 겁니까.

 

그 친구들은 NBA에서 큰 성공을 거둔 야오밍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하나같이 ‘키가 크니까 NBA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거다. 야오밍의 키가 우리랑 비슷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죠. 야오밍을 인정하지 않는데 저는 어떻겠어요(웃음). 선수 취급을 안 해주는 환경에서 치고 올라가야 하니까 너무 힘들었습니다. 대놓고 이런 말도 했어요.

 

어떤? 

 

오픈 찬스가 있는데 볼을 안 줘요. 그리고선 자기들끼리 얘기합니다. ‘쟨 어차피 줘도 못 넣어’라고. 적응하기 위해선 독해지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악물었어요. 누군가 날 무시하면 가만있지 않았죠. 같이 욕하며 싸운 적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어요.  

 

살아남기 위해 독해진 거군요. 효과는 있었습니까. 

 

사실 미국인들끼리도 많이 싸웁니다. 경쟁이 상상 이상으로 치열하거든요. 어떻게든 경쟁자를 밟고 올라서야 대학이나 NBA 스카우트들에 자신을 알릴 수 있습니다. 방법이 없어요. 볼을 많이 잡고 슛을 던져야 내 능력을 보여주죠. 같은 팀끼리 진행하는 5:5 연습경기 역시 피가 터집니다. 팔꿈치로 상대를 가격하는 건 애교예요(웃음). 매 순간이 전쟁인 거죠.  

 

미국이라고 하면 자유분방하고 항상 웃으면서 경쟁할 거 같은 인식이 있습니다. 

 

절대 안 그래요.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합니다. 특히나 대학 리그 같은 경우 라이벌 팀과 경기하는 날엔 2만 명이 넘는 관중이 들어차요. 그 경기를 보기 위해 대학팀 시즌권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숨 걸고 경기에 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거죠. 

 

고교 졸업 후 농구 명문으로 꼽히는 메릴랜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고교 시절엔 언제부터 두각을 나타낸 겁니까.  

 

2학년 때까진 많이 못 뛰었어요. 졸업반 때부터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죠. 운이 좀 따랐습니다. 같은 포지션에서 경쟁하던 선수가 학점 미달로 반 시즌을 쉬어야 했어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게 대학 진학으로 이어진 거죠.  

 

미국에서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농구를 제아무리 잘해도 성적이 좋지 않으면 대학 진학이 어렵습니다. 내신은 좀 떨어져도 미국 수학능력시험(SAT)을 잘 보면 대학 진학이 가능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나요(웃음). 운동만 해도 죽을 맛인데 공부까지 따라가려니 진짜 힘들었습니다. 영어가 부족한 까닭에 다른 친구들이 1시간이면 끝낼 걸 밤을 새워가면서 한 날이 많았죠. 

 

유학 시절 아쉬웠던 점 토로한 최진수 “대한민국농구협회와 정말 많이 싸웠습니다”

 

미국 메릴랜드 대학 시절 최진수(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미국 메릴랜드 대학 시절 최진수(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고교 3학년부터 주전으로 뛰기 시작한 덕분에 농구 명문 메릴랜드 대학 입학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인이 NCAA 디비전 1에 진출한 건 최초였어요. 

 

그 당시 고민이 많았습니다. 메릴랜드 대학을 포함해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어요. 돌이켜보면 메릴랜드를 선택한 데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다만 가끔 이런 생각은 하죠. 주전으로 뛸 수 있는 대학을 선택했다면 미국 생활이 조금 더 길어지진 않았을까. 대학 1학년 때부터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며 경기를 못 뛰었어요. 

 

루키 시즌부터 주전 자리를 꿰차는 건 어려운 일 아닙니까. 

 

안 좋은 일은 겹친다고 하잖아요. 1학년 말엔 감독님과 트러블까지 있었습니다. 비시즌 때 계절 학기를 들으면서 트레이너와 3~6주간 웨이트 트레이닝 중심으로 운동을 하는 게 규칙이거든요. 그런데.   

 

말씀하세요.  

 

다른 선수들은 다 그 규칙을 따랐는데 전 아니었습니다. 한국 농구 대표팀에 차출이 되면서 계절학기와 개인 운동을 하지 못했어요. 그때 대한민국농구협회에 여러 차례 사정을 말했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죠. 심지어 차출을 거부하면 몇 년간 대표팀에 뽑지 않을 것이란 얘기까지 했어요. 답답했습니다. 학교에 사정을 이야기했을 때 감독께선 이렇게 답변하셨어요. 

 

어떤?

 

‘내가 이렇게까지 기회를 주는데 참 아쉽다’고. 거기서 트러블이 생긴 거죠.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아쉽습니다. 내 잘못이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여전하고요. 대표팀에 합류해서 경기에 꾸준히 나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벤치만 지키는 날이 많았고, 최종 명단에서 탈락하는 일도 있었죠. ‘경험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어요. 휴.

 

지금도 아쉬운 감정이 표정에서 드러납니다. 

 

미국 농구에 도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전 (하)승진이 형을 아주 존경합니다. 한국 농구 역사에서 NBA 코트를 밟아본 이가 승진이 형 말고 없잖아요. 도전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한 농구계에서 그런 인재가 나왔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인데 농구계는 그걸 모르는 거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한 수 아래로 평가하는 일본만 봐도 시스템 자체가 달라요. 

 

일본이요?

 

‘일본이 짧은 시간 안에 한국과의 실력 차를 줄이고 앞서나가게 될 것’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한 예를 들어볼게요. 아주 유명한 슬램덩크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2006년부터 ‘슬램덩크 장학금’을 신설해 농구 선수를 꿈꾸는 일본 고교생들의 미국 유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수가 있습니까. 

 

167cm 키로 NBA에 여러 차례 도전한 토가시 유키가 슬램덩크 장학금 수혜자 중 한 명이예요. 일본은 그런 선수들의 도전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솔직히 부러워요. 전 고교 시절부터 대표팀 오가며 비행기 값 한 번 지원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걸 학생인 제 사비로 해결했어요. 그래놓고 ‘애국심을 가지고 죽을힘을 다해 뛰라’며 이것저것 요구하기 바빴죠. 대표팀 얘기가 나왔으니 한마디만 더 할게요. 

 

예. 

 

한국에서 대표팀 유니폼 입고 뛰는 선수들 정말 존경해야 합니다. 지금도 애국심 하나만 가지고 뛰는 선수들이에요. 이번 월드컵에서 몸을 아끼지 않아 부상 당한 선수들을 협회에서 책임져 줍니까. 절대 아니죠. 본인과 소속팀이 해결해야 합니다.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요. ‘애국심’만 앞세우는 게 한국 농구의 현실입니다. 

 

다시 대학 시절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KBL에서 전태풍(SK 나이츠)과 함께 미국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무대를 누벼본 몇 안 되는 내국인 선수입니다. 미국 고교와 대학 무대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학에 가보니 ‘고교 무대는 치열한 게 아니었구나’란 걸 느꼈습니다. 대학은 고교에서 선택받은 선수만 올 수 있는 곳이에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죠. 규모에서도 차이가 큽니다. 2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에서부터 코칭스태프, 트레이너, 매니저 등 없는 게 없어요. 심지어 메릴랜드 대학 재학 시절엔 전용기까지 있었습니다. 

 

전용기요?

 

스포츠용품 회사인 언더아머 케빈 플랭크 회장이 메릴랜드 대학 출신입니다. 그분이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어요. 농구화와 유니폼부터 전용기까지. 선수들이 농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죠.  

 

고교 시절까진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농구를 한다고 했습니다. 미국 대학에서의 훈련은 어떻습니까.  

 

고교, 대학, NBA 다 달라요. 대학은 유럽 농구와 비슷합니다. 약속된 패턴을 중심으로 훈련하고 경기에 임하죠. 감독마다 성향과 스타일이 다르지만 대부분 대학이 비슷합니다. 

 

실전은 어떻습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고교 시절엔 8~10시간 버스 타고 원정 경기 장소로 이동하는 날이 많았어요. 그런데 대학에선 버스를 타고 전용기가 있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선 전용기를 타고 원정 경기 장소로 향하죠. 경기마다 1만 명 이상 관중이 들어차는 건 기본이고, NBA 못잖은 수준급 플레이가 끊임없이 나옵니다. 미국인들이 NCAA에 열광하는 이유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죠.  

 

미국 도전을 대학 2학년 재학 중 마무리했습니다. 좋은 환경 속 농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건 맞지만, 학업을 병행하는 게 아주 힘들었다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농구뿐 아니라 학업 역시 고교 시절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주말이나 시험 기간엔 밤을 새워가면서 공부를 했어요.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었지만 대학에서 시험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영어는 달랐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짧은 시간에 끝내는 걸 4~6시간씩 붙잡고 있어야 했죠. 부모님께선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했지만, 내가 울면서 빌었어요. 

 

아. 

 

좋은 환경에서 운동을 할 수 있었지만,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출전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계절 학기와 개인 운동을 해야 할 때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감독님 눈 밖에 나기도 했죠. 시험 성적이 기준에 미치지 못했을 땐 감독께서 ‘남은 시즌엔 연습에도 참여하지 못한다’고 통보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어요. 마음 편히 운동에만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인 최초 NCAA 디비전 1을 누빈 선수입니다. 하승진 이후 NBA 진출 가능성이 가장 큰 선수였죠. 미국 도전을 포기한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까. 

 

없다면 거짓말이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메릴랜드가 아닌 주전으로 뛸 대학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어요. 부모님 말씀대로 조금만 더 버텼다면 어땠을까 후회한 적도 많죠. 하지만, 다 지나간 일입니다. 미국 유학부터 한국 복귀까지 모두 내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최대한 후회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미국 농구를 경험한 게 큰 도움이 된다는 걸 느낄 때가 있습니까. 

 

‘2m 이상 선수는 반드시 골밑 포지션을 소화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어릴 때만 해도 2m 이상 선수가 3점슛을 쏘는 장면은 흔치 않았습니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스크린을 걸고 박스아웃에 집중하는 게 당연시됐죠. 틀에 얽매이지 않는 농구 할 수 있는 건 미국에서의 경험 덕분입니다.  

 

KBL에 데뷔한 최진수 “미국과 다른 문화 때문에 한동안 고생했다”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최진수(사진=KBL)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최진수(사진=KBL)

 

2011년 일반인 신분으로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에 참여해 1라운드 3순위로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처음부터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참가를 선택한 건 아니었습니다. 고민이 많았어요. 대학교 편입을 준비했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았죠. 타국 리그 진출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은 건 KBL 도전이었죠. 22살의 어린 나이었지만 운동을 쉬고 싶지 않았습니다. 과감하게 도전한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거 같아요.  

 

중학교 졸업 후 한동안 한국을 떠나있었습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보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가 훨씬 힘들었습니다. 선·후배 관계부터 말과 행동까지 모든 게 어려웠어요. 형들이 ‘한국에선 이와 같은 상황에 이런 말 안 하는데 쟤는 왜 그럴까’란 생각을 많이 했을 겁니다. 코트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했어요. 기존 선수들과 달리 슛을 던지고 움직이니까 주변에서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죠. 

 

하지만, 루키 시즌부터 놀라운 활약을 펼쳤습니다. 

 

농구만 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농구에 대한 굶주림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거 같아요. 많은 분이 1년 차 시즌을 기억해주는 이유죠(웃음). 개인적으론 루키 시즌보다 2년 차 시즌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1라운드까지 몸 상태가 아주 좋았는데 어깨가 탈구되면서 개인과 팀 성적 모두 떨어졌거든요. 그때 재활을 병행하면서 아픈 걸 참고 뛰었는데...

 

예. 

 

사람이 한 번 추락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내려갈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쭉쭉 내려가더라고요(웃음). 첫 시즌 농구계의 이목을 사로잡으며 승승장구한 것과 다르게 주저앉으면서 배운 게 많았어요. 그때의 경험이 선수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이겨낼 힘을 길러준 거 같습니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거 같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걸 배우고 경험했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한국에선 농구를 시작한 초교 시절부터 쭉 선발로 출전했습니다. 식스맨으로 나선 건 프로 2년 차 때가 처음이었어요.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최상의 몸 상태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걸 느꼈죠.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면서 경기를 보는 시야를 넓히기도 했고요.    

 

본인은 2년 차 시즌이 가장 인상 깊다고 하지만 농구계는 여전히 최진수의 루키 시즌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규리그 54경기를 모두 소화한 유일한 시즌이었고, 프로 7시즌 가운데 가장 많은 평균 득점(14.4)을 기록했어요. 

 

알고 있습니다(웃음). 새 시즌엔 꼭 프로 첫 시즌의 기록을 뛰어넘고 싶어요. 첫 시즌을 돌아보면 함께 뛴 고(故) 크리스 윌리엄스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윌리엄스는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기록을 남긴 다재다능한 선수였죠. 윌리엄스가 처음에 이런 말을 해줬어요. 

 

어떤 말이요?

 

‘한국이 네 조국이긴 하지만, 너도 미국에서 농구를 하다 왔다. 국외 리그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란 마음으로 매 경기 온 힘을 다하라’고 했죠. 코트 안팎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가르쳐 준 형 같은 존재였습니다.   

 

“미국 도전하는 후배들에 응원과 격려 아끼지 않았으면”

 

새 시즌 준비에 한창인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최진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새 시즌 준비에 한창인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최진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3년 차 시즌(2013-2014)을 마친 뒤 입대했습니다. 평균 출전 시간(32분 29초->22분 53초)부터 득점(11.9->7.9), 리바운드(5.1->2.9) 등 모든 기록이 2년 차 시즌과 비교해 떨어진 채로 상무에 갔어요. 

 

2년 차 시즌의 부진이 이어진 거죠(웃음). 그 덕에 상무에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많아 지난 나날을 돌아볼 수 있었죠. 그렇게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향후 계획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기량 향상에도 시간을 쏟으면서 전역 후 복귀를 준비했고요.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췄습니까. 

 

이것저것 다 해봤어요. 예전처럼 골밑에 힘을 실은 플레이를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외곽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어떤 게 잘 되고 안 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어느 한 포지션에 국한되지 않은 까닭에 아주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 덕분일까요. 전역 후 곧바로 KBL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솔직히 우승 시즌엔 주축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정규리그 막판 복귀해 10경기를 뛰었고 플레이오프에선 출전 시간이 길지 않았죠. 좋은 동료들을 만난 덕분에 우승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상무에서 자신감을 찾으면서 향후 주축 선수로 우승에 도전하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실제로 2017-2018시즌부터 팀 에이스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즌엔 농구계가 그리워하는 프로 첫 시즌 못잖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정규리그 51경기에서 뛰며 경기당 평균 13.6득점, 5.3리바운드, 1.9어시스트를 기록했죠. 

 

2017-2018시즌을 마치고 팀 내 최고 연봉자가 됐습니다. 보수 총액 6억 5천만 원에 도장을 찍었죠. 오리온이란 팀에서 날 인정한다는 걸 느꼈고 책임감이 강해졌어요. 연봉 협상 과정에서 팀과 갈등을 빚은 적이 많았는데 감사했죠(웃음).  

 

지난 시즌 한 가지 아쉬울 법한 건 6강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부상을 당해 팀의 탈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목을 삐끗했는데 처음엔 크게 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발목이 부었더라고요. 어떻게든 뛰어서 4강 플레이오프에 올라가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많았죠. 새 시즌에 만회할 겁니다(웃음). 

 

시즌을 마친 뒤인 5월 새신랑이 됐습니다. 

 

휴식기를 시즌 못지않게 바쁘게 보냈습니다(웃음). 새 시즌엔 가장이 된 만큼 더 잘해야 해요. 부상 없이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 2019-2020시즌에 돌입해야죠.  

 

새 시즌엔 마커스 랜드리(195cm), 조던 하워드(180cm)와 호흡을 맞춥니다. 농구계 일각에선 ‘신장 제한이 사라진 올 시즌 오리온 외국인 선수의 키가 너무 작은 것 아니냐’는 우려는 드러내고 있습니다. 

 

2015-2016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선 우리보다 전주 KCC 이지스 선수들의 신장이 훨씬 컸습니다. 결과는 포인트 가드 조 잭슨(180cm)을 앞세운 우리의 승리였죠. 오리온은 재미를 최우선으로 해요. 팬들이 보고 즐길 농구를 펼치다 보면 결과는 저절로 따라올 거로 믿습니다(웃음).  

 

새 시즌 가장 바라는 건 무엇입니까. 

 

우승이란 단어는 쉽게 꺼낼 수 없는 거 같아요. 우선 상위권을 바라봅니다(웃음). 시즌 내내 다치지 않고 많은 시간 코트를 누비고 싶어요. 그리고...

 

예. 

 

인터뷰를 마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현중이가 스테픈 커리의 모교인 데이비슨 대학교에 입학해 NCAA 디비전 1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여)준석이 역시 미국 도전의 꿈을 안고 있죠. 이 선수들이 자신들이 세운 계획에 따라 꿈에 다가설 수 있도록 가만 놔뒀으면 좋겠어요. 

 

가만 놔둔다?

 

성공과 실패로 한국 농구의 소중한 인재들을 평가하지 않았으면 해요. 농구로 미국에 도전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조심스럽지만 팬들께 부탁하고 싶어요. 현중이가 경기를 하다 보면 뜻대로 풀리지 않는 날이 많을 겁니다. 결과만 가지고 평가해 안 좋은 말을 한다면, 타지에 있는 어린 친구에겐 상처만 남아요. 그런 부분을 조금만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미국 도전이 얼마만큼 힘든지 알기 때문에 하는 부탁입니다.    

 

그 선수들이 NBA로 진출하면 좋겠지만 안 되면 또 어때요. 한국에서 성장한 농구 선수가 세계 최고의 무대로 도전한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솔직히 미국으로 가는 게 두려워서 도전을 포기하는 선수가 의외로 많습니다. 현중이가 미국 무대에 후회 없이 도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더 많은 농구 유망주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한국 농구 발전을 위해 이보다 좋은 게 있을까요. 오리온과 현중이에게 많은 응원과 격려 부탁드리겠습니다(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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