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훈, 몸의 일부분 떨리는 ‘본태 성진전증’ 이겨내고 8년째 당구 선수 활약 중

-“당구 선수에게 몸이 떨린다는 건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몸 떨림은 참을 수 있었지만, 당구를 멀리하는 일은 참을 수 없었다”

-“한때는 20대를 당구장에서만 보낸 걸 후회. 지금은 활짝 웃으며 당구 하는 백발노인 꿈꾼다”

안지훈은 본태성 진전증으로 당구 선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쉬어야 했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안지훈은 본태성 진전증으로 당구 선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쉬어야 했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일산]

본태성 진전증. 특별한 원인 없이 몸의 일부분이 떨리는 증상이다.

당구 선수 안지훈(40·국내 7위)은 2005년 제1회 대한체육회장배 전국당구대회에서 전국의 강호를 꺾고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구 선수의 길로 들어선 지 5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빛나는 미래를 예고했던 안지훈의 성장을 가로막은 건 본태성 진전증이었다. 일상생활에서 아무 증상이 없었지만, 어느 순간 부터 큐대만 잡으면 머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일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졌다. 2009년부턴 더는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당구 열정엔 변함이 없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20대를 당구장에서만 보낸 안지훈은 은퇴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안지훈은 당시를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표현했다.

“20살 때 당구를 시작했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우뚝 서야 한다는 생각만 했죠. 대회마다 큰 부담감을 느꼈죠. 당구를 누구보다 좋아한다고 자부했지만 즐기지 못했던 거예요. 그런 나날이 이어지면서 머리가 떨리기 시작했죠. 이 역시 극복해야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네, 제 오산이었습니다. 상태가 더 악화했어요.” 안지훈의 회상이다.

당구계를 떠난 지 1년 8개월. 안지훈은 각고의 노력 끝에 다시 당구계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본태성 진전증을 떨쳐낸 건 아니다. 본태성 진전증은 완치가 어렵다. 하지만, 안지훈은 복귀 후 8년째 선수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8월 21일엔 ‘2020 경남고성군수배 전국당구선수권대회’ 정상에 올랐다. 당구계 떠오르는 샛별로 이름을 알린 2005년 이후 첫 우승이었다.

안지훈은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평생 당구와 함께 하는 게 꿈”이라고 강조했다. 엠스플뉴스가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에 출전하고 있는 안지훈을 만났다.

- 2005년 당구계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안지훈 “본태성 진전증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

8월 21일 15년 만에 전국대회 정상에 오른 안지훈(사진=엠스플뉴스)
8월 21일 15년 만에 전국대회 정상에 오른 안지훈(사진=엠스플뉴스)

8월 21일 당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경상남도 고성군 국민체육센터에서 열린 ‘2020 경남고성군수배 전국당구선수권대회’ 3쿠션 남자 일반부 정상에 올랐습니다.

2005년 제1회 대한체육회장배 우승 이후 15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대회였어요.

여러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2000년 대전당구연맹에 선수등록을 하면서 당구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5년 만에 전국대회 정상에 오르며 두각을 나타냈죠. 당구에 미친 시기였어요. 365일 당구장에서 살았습니다. 한국 최고의 선수로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죠. 그렇게 꽃이 필 무렵 시련이 들이닥쳤어요.

시련이요?

2008년 본태성 진전증이 찾아왔습니다. 본태성 진전증이란 특별한 원인 없이 몸의 일부분이 떨리는 증상이에요.

아.

본태성 진전증이 갑자기 찾아온 건 아니었습니다. 2003년부터 증상이 있었어요. 주변에서 당구 칠 때 머리가 떨린다는 얘길 했습니다. 당시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방송으로 제 경기 영상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넘길 일이 아니’란 걸 말이죠.

어떻게 했습니까.

제 경기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습니다. 머리가 계속 떨리는 걸 확인했죠. 첫 전국대회 정상에 오른 이후였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병원은 다 가봤어요. 20만 명 가운데 1명꼴로 나타나는 머리 떨림 증상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죠. 뚜렷한 원인이 없다고 하니 미칠 것 같았습니다. 2009년엔 증상이 심해져서 당구를 그만둘 정도였죠.

어느 정도였던 겁니까.

재미난 게 뭔지 아세요? 큐대만 잡으면 본태성 진전증을 보인다는 겁니다. 쉽게 설명하면 긴장성 장애예요. 특정한 일을 할 때 증상이 나타나는 거죠. 밥을 먹거나 필기를 할 땐 머리가 떨리는 현상이 없습니다. 최고의 당구 선수를 꿈꾼 제게 본태성 진전증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어요.

당구를 칠 때만 본태성 진전증을 보인 이유가 있습니까.

당구에 대한 집념이 강했어요. 어떻게든 최고로 올라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20대를 보냈죠. 성적에 대한 부담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성적에 대한 부담이 어느 정도로 컸던 겁니까.

15살 때 큐대를 처음 잡았습니다. 재능이 있었어요.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엔 동네 당구장에 적수가 없을 정도였죠. 하지만, 당구 선수를 꿈꾸진 않았어요. 학창 시절엔 당구를 스포츠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구를 스포츠로 생각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운동을 곧잘 했어요. 중학교 때까진 육상부 생활을 했죠. 고교 시절엔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는 유도 유망주였습니다. 스포츠는 땀을 흘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당구는 운동을 마치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놀이로 봤어요.

당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언제부터입니까.

20살 때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20년을 살면서 당구만큼 재능을 보인 게 없었어요. 텔레비전에서 당구 선수들이 치는 걸 보고 바로 따라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죠. 머릿속에 생각한 대로 플레이했어요. 무엇보다 당구에 집중할 때 행복했습니다.

그런 당구를 2009년 그만뒀습니다.

방법이 없었어요. 당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습니다. 당구를 그만두고 1년 8개월간 당구장을 한 번도 안 갔어요. 잠자리에 들 때마다 당구가 생각났지만 꾹 참았습니다. 당구장에 가는 순간 더 큰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란 걸 안 거죠.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본태성 진전증보다 힘든 건 큐대를 잡지 못하는 현실” -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에 참여하고 있는 안지훈(사진=엠스플뉴스)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에 참여하고 있는 안지훈(사진=엠스플뉴스)

20살 때부터 당구 선수로 살았습니다. 당구를 그만두고 나선 새 직업을 찾은 겁니까.

20년 전 당구가 좋아서 선수의 삶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었어요. 당구 선수만으론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직업이 필요했죠. 일찍부터 개인 사업을 했어요. 당구 관련 일은 아닙니다. 당구를 관둔 후엔 그 일에 집중했어요. 몸이 힘들어야 당구 생각이 안 날 것 같아서 미친 듯이 일만 했죠(웃음).

결국엔 당구계로 돌아왔습니다.

죽을힘을 다해서 당구를 멀리하려고 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취미로 당구를 즐기자고 수천 번 다짐했어요. 하지만, 당구를 잊을 수 없습니다. 큐대를 놓은 지 1년 8개월이 지났을 때였어요. 미친 듯이 당구가 하고 싶었습니다. 당장 당구를 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죠. 마음속으로 딱 한 번만 치기로 약속한 뒤 당구장으로 향했습니다.

1년 8개월 만에 큐대를 다시 잡았습니다. 당시 감정을 기억합니까.

공사장에서 막대기 하나 주워다가 공을 치는 것 같았어요(웃음). 실력이 예전 같지 않았죠.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당구를 다시 시작해 볼까. 당구대 앞에서 심장이 뛰는 걸 느낀 겁니다. 잘하고 못 하고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매일 설레는 일을 하고 싶었죠. 마음 한쪽에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업에만 충실하면 먹고사는 데 큰 걱정이 없었습니다. 당구 선수로 살 때처럼 큰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 수 있었죠. 본태성 진전증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고요. 한 달 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죠.

선수 복귀를 결심한 거군요.

일을 마치고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걸었습니다. 도착해보니 당구장이었죠. 한 번 두 번 당구를 하다 보니 다신 큐대를 놓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꽉 잡았죠. 31살에 당구 선수로 복귀했습니다.

본태성 진전증은 완치가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당구를 다시 시작하면서 다짐한 게 있어요. 성적 욕심내지 말고 당구를 치자. 당구 칠 때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나 당구는 스포츠입니다. 경쟁을 피할 수 없죠. 대회에 출전하니 바로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어찌했습니까.

이전처럼 증상이 심해지면 어쩌나 걱정했죠. 힘겹게 선수로 복귀했습니다. 당구를 평생 칠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웠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내게 이야기했어요. 성적과 관계없이 당구를 즐기자. 목표는 우승이 아니다.

목표는 우승이 아니다?

평생 큐대를 놓지 않는 게 꿈이에요. 당구하면서 웃는 것 하나로 충분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끊임없이 하다 보니 증상이 많이 나아졌어요. 2012년부터 지금까지 당구 선수 생활을 이어온 겁니다. 지금은 어떤 대회에 출전하든 마음이 편해요.

마음이 편하다?

결과가 중요하지 않으니깐. 꾸준히 연습하면 오늘보다 내일 더 잘할 수 있는 게 당구라고 믿었습니다.

‘2020 경남고성군수배 전국당구선수권대회’ 우승이 값진 이유가 여기에 있네요.

본태성 진전증을 보인 후 첫 우승이었습니다. 정상을 목표로 달려온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더 값졌죠. 대회 내내 마음이 아주 평온했어요. 어떤 선수와 대결하든 내 플레이에만 집중했죠. ‘여기서 떨어지면 어때. 마음껏 즐기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창문으로 푸른 바다를 보며 여유를 만끽하는 느낌이었어요. 우승을 확정한 후에도 무덤덤했습니다.

무덤덤했다?

평소처럼 욕심내지 않고 당구를 즐겼습니다. 우승에 욕심을 냈다면 결과는 달랐을 거예요. 본태성 진전증이 다시 심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전국대회 우승은 준비 없이 불가능합니다.

당구를 즐긴다고 해서 준비를 안 하는 건 아니에요(웃음). 대회 우승 후 올 한 해를 돌아봤습니다. 꾸준했어요. 대회가 있든 없든 하루 6시간씩 규칙적인 연습을 이어갔죠, 이런 과정이 하나둘 쌓여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어요.

-“성적에 신경 쓰지 않고 평생 당구와 함께 하고 싶어요” -

안지훈(사진 맨 오른쪽)은 당구할 때 가장 많이 웃고 행복감을 느끼는 선수다(사진=엠스플뉴스)
안지훈(사진 맨 오른쪽)은 당구할 때 가장 많이 웃고 행복감을 느끼는 선수다(사진=엠스플뉴스)

당구가 왜 좋습니까.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습니까(웃음). 그냥 좋아요. 다른 스포츠에서 느낄 수 없는 당구만의 매력이 있습니다. 당구는 치면 칠수록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죠. 청소년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스포츠예요.

청소년들에게 권하고 싶다?

당구는 청소년들의 성장에 큰 도움을 줍니다. 집중력 향상과 차분함을 기르는 데 이만한 스포츠가 없죠. 처음엔 포켓볼로 시작해 3쿠션으로 넘어오면 아주 좋을 것 같아요(웃음). 3쿠션은 실력을 키우는 데 시간이 필요하지만 포켓볼은 금방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재밌어요. 가족, 친구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이기도 하고요.

본태성 진전증을 이겨내고 당구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힘들 땐 없습니까.

없다면 거짓말이죠(웃음). 지쳤다고 판단이 서면 나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한적한 곳으로 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생각에 잠기죠.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겁니다. 그렇게 재충전을 마치면 한결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일상에 복귀할 수 있습니다. 힘겨운 시대를 보내고 있는 청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대학교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2개 이상 하는 청년이 수두룩합니다. 그 청년들은 공부도 소홀하지 않죠. 제가 당구 선수로 살면서 후회하는 게 딱 하나 있어요.

어떤?

20대 안지훈은 당구로 가득해요. 당구장에서 살았습니다. 지치고 힘들 땐 채찍을 들었어요. 내게 말했죠. ‘지금 쉬면 경쟁자보다 뒤처질 수 있다’고. 10년간 친구도 만나지 않았어요.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이 삶이 평생 완치될 수 없는 병을 불러왔어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경험하게 했죠. 땀 흘리고 나아가는 것만큼 휴식도 중요합니다.

안지훈의 인생에서 당구는 어떤 존재입니까.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죠. 지금처럼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행복하게 당구와 함께 하고 싶어요. 활짝 웃으며 당구 치는 백발노인을 꿈꿉니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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