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 논란으로부터 1년 만에 기자회견 연 전명규 전 빙상연맹 부회장
-‘젊은빙상인연대’ 향해 ‘특정 의도 가진 사람들’ 메신저 공격, 근거는 제시 안 해
-명확한 증거 나온 의혹에 ‘모른다’로 일관…눈앞에서 증거 문자 보여줘도 ‘모르쇠’
-빙상계 “시시비비 가리기 위해 검찰 수사 불가피”
[엠스플뉴스]
‘빙상계 차르’ 전명규 한국체육대학교 교수(전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부터 시작된 숱한 논란과 의혹 제기에도, 빙상연맹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 감사와 관리단체 지정에도, 폭행과 성폭력 피해를 본 제자들의 호소에도 묵묵부답이던 그가 마침내 공개 기자회견 자리에 섰다.
1월 21일 서울 올림픽파크텔. 이날 2층 기자회견장은 전 교수의 긴급 기자회견을 취재하려는 기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전 교수는 회견 예정 시간인 3시에 딱 맞춰 계단으로 등장했다. 짙은 감색 정장에 뿔테 안경을 쓰고,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걸어 올라왔다.
일부 취재진이 전 교수에게 다가가 질문을 쏟아냈다. 전 교수는 대답하지 않고 회견장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누군가 ‘감독님 힘내세요’ ‘감독님 응원합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보니 “빙상을 아끼는 팬의 한 사람”이란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빙상계 관계자였다.
전 교수는 김진영 변호사(김진영 법률사무소)와 함께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그간 빙상연맹의 각종 소송을 담당해온 김 변호사는 이날 오전 전 교수의 연락을 받고,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기자회견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전 교수는 오전 신문에서 “대한체육회가 빙상연맹 해체를 검토한다”는 기사를 보고 기자회견을 결심했다고 했다.
취재 결과 이날 기자회견장 대여엔 빙상연맹의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전 교수는 부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빙상연맹 관련해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빙상연맹은 현재 관리단체로 지정된 상태다. 이와 관련 김 변호사는 “오늘까지는 빙상연맹과 관계없고, 계시던 담당자 중에 한 분을 통해 예약했다. 연맹 전체와 연결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젊은빙상인연대 향한 메신저 공격, 근거는 없었다
이날 전명규 교수의 기자회견을 지켜본 한 빙상인은 “전형적인 ‘전명규 수법’이 총동원됐다”고 평가했다. 대표적인 게 ‘메신저 공격’이다.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고, 배후 세력이 있다고 주장한 뒤 이를 반 전명규 세력 대 전명규 세력의 ‘파벌싸움’으로 몰아가는 전략을 가리킨다.
전 교수는 첫 발언부터 메신저 공격으로 시작했다. 그는 “특정 의도를 지닌 사람들과 일부 언론 매체들이 나에 관해 보도하고 있는데, 이는 나 개인뿐 아니라 열심히 일한 선수들과 지도자, 빙상인들에게 누가 될 것이라 생각해 용기를 내 기자회견을 자처했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는 젊은빙상인연대와 손혜원 국회의원(무소속)이 기자회견을 열어 빙상계 성폭력 피해자를 추가 공개했고, 전 교수가 이를 알고도 은폐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또 전 교수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전 교수가 말한 ‘특정 의도를 지닌 사람들’은 이를 가리킨 것으로 풀이된다.
한 취재진은 “젊은빙상인연대의 주축이 특정 지역 빙상장을 거점으로 한 스케이트 코치가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특정 세력이 이를 가리키는 것이냐”라고 질문했다. 이에 전 교수는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진심으로 빙상 발전을 위해 하는 것인지는 개인적으로 의구심이 든다”며 “그 단체가 어떤 구성으로 돼 있고 어떤 사람들인지 여러분들이 취재해 보셨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전 교수가 저격한 ‘젊은빙상인연대’는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현직 지도자 및 빙상인들이 만든 단체다. ‘불이익과 두려움을 감수하고 정의롭고 공정한 대한민국 빙상계를 만들자’는 게 연대 결성 목적이다.
젊은빙상인연대가 공개한 녹취록에 대해서도 전 교수는 즉답 대신 ‘음모론’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날 오전 공개된 녹취록에는 전 교수가 폭행 피해자 심석희의 기자회견을 막았다는 발언, 심석희 측에 합의를 설득하라는 지시, 가해자 조재범의 변호사비를 모으라고 강요하는 발언, 조재범 폭행 피해자들의 지인을 찾아 압박하라는 발언 등이 담겼다.
전 교수는 이에 대해 “조재범 전 코치가 구속되기 전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젊은빙상인연대의 어떤 사람이 전명규와 관련된 비리 내용을 주면 합의서를 써 주겠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도 그 내용을 확인했다”며 엉뚱한 의혹을 제기했다.
또 “녹취를 한 사람은 나에게 녹취 사실을 알리지 않고 그 내용을 젊은빙상인연대에 전달했다”며 녹취 내용에 담긴 문제가 아닌 녹취 행위를 문제 삼았다. 이를 두고 한 빙상인은 “오래전 초원복집 사건 당시 ‘공권력의 선거 개입’이나 ‘지역감정 조장’ 대신 ‘도청 행위’를 문제 삼은 김기춘의 수법을 빼다 박았다”고 비판했다.
전 교수는 메신저 공격과 음모론을 제기하면서도 구체적인 증거는 하나도 내놓지 못했다. 젊은빙상인연대가 각종 녹취록과 문자메시지 등을 통해 확실한 증거자료를 제시한 것과 대조를 이뤘다. 일례로 전 교수는 ‘전명규 비리를 가져오면 합의서 써준다고 한 게 무슨 얘기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는 질문에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하는 건 변호사와 협의했는데 안 하는 게 낫다고 해서 안 하겠다”며 답을 피했다.
그러면서 전 교수는 “기자분들의 취재로 충분할 것”이라는 묘한 얘길 했다. 지난해 엠스플뉴스는 ‘전명규가 만든 ‘파벌 싸움’ 프레임...기사 내용·방향까지 설계했다 ’ 제하의 기사를 통해 전 교수가 빙상계 반대파를 제거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을 전환하는데 어떻게 언론을 활용하려 했는지 구체적인 증거 자료를 통해 폭로한 바 있다.
전 교수의 지시로 측근이 작성한 각종 문건에는 전 교수가 언론 보도의 내용과 방향까지 직접 기획하고, 기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라고 지시한 정황이 잘 드러나 있었다. “여러분들이 취재해 보셨으면 좋겠다” “(이번 사태가) 빙상계 파벌싸움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전 교수의 발언이 어떤 매체의 보도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눈여겨볼 대목이다.
녹취록, 문자메시지 등 증거 나온 의혹에 ‘모른다’로 일관
전명규 교수는 공격자들을 향해 근거 없는 메신저 공격과 음모론을 제기하는 한편, 녹취와 문자메시지 등 구체적 증거가 나온 자신을 향한 의혹엔 ‘모르쇠’로 일관했다.
‘성폭행 은폐 의혹’ 질문에 전 교수는 “성폭력 관련해서 난 전부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조재범 전 코치가 심석희를 상습 폭행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심석희는 어려서부터 조재범 코치에게 스케이트를 배웠고, 한국체대에 입학해서도 대표팀 소속으로 선수촌에서 훈련했다. 그런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이날 오전 젊은빙상인연대는 한 성폭력 피해선수가 전 교수에게 피해사실을 알린 문자메시지를 공개한 바 있다. 전 교수가 제자의 성폭력 피해사실을 알고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성폭력 관련해서 전부 알 수 없다’는 전 교수의 해명에 설득력이 없는 이유다. 이에 대해 전 교수는 “기사를 보지 못해서 말씀드리기 힘들다”고 답을 피했다.
또 ‘조재범 옥중편지 내용이 다 거짓이라고 했는데, 내용에는 구체적인 장소나 액수가 나와 있다’는 질문에도 전 교수는 즉답 대신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건, 제가 국가대표 코치를 25살에 됐다. 부모님들로부터 커피 한 잔 받지 않겠다고 맘 먹고 들어갔다. 체대 와서는 입학하면서 어떤 그러한 불합리한 일에 쏠리지 않겠다고 했다”고 동문서답을 늘어놨다.
일부 불리한 질문에는 빙상연맹을 방패로 삼았다. ‘성폭력 의혹이 불거진 지도자를 대표팀 코치로 앉혔다’는 의혹에 대해 전 교수는 “연맹에서 조치 다 해서. 공정위 조사 거쳐서 내용이 연맹에 있는 것으로 안다. 연맹에 확인하라. 내가 다 기억을 못 한다”고 답했다.
이 얘길 전해 들은 한 빙상인은 “이미 문체부 감사에서 그간 빙상연맹이 전명규 교수의 1인 독재체제로 운영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연맹에서 꾸린 공정위도 모두 전 교수 측근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런 연맹의 조사 결과를 확인하라는 건, 사실상 의혹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심지어 전 교수는 언론 보도를 통해 이미 증거가 공개된 의혹에 대해서도 부인으로 일관했다. ‘대한항공 취업 청탁’ 의혹에 대해 전 교수는 “전혀 그렇지 않다”며 대한항공 관계자에게 지인 딸의 취업 청탁 문자를 보낸 사실이 없다고 답했다.
이에 한 취재진이 “문자 보낸 적 없다고 했는데, 내가 문자 가지고 있다. 개인정보와 수험번호까지 다 들어있는 문자”라며 실제 전 교수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공개하자 전 교수는 “그 친구에게 청탁한 게 아니다” “대한항공 감독이 그 사람을 입학시킬 수 있을까요?”라며 끝까지 부인했다. 엠스플뉴스는 지난해 ‘[단독 입수] 전명규, 대한항공에 보낸 ‘취업 청탁 문자’ 공개’ 기사를 통해 관련 의혹과 문자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전 교수는 ‘김재열 제일기획 대표를 ISU 상임위원 만들기 위해서 내부 정보 주고받았다는 게 사실인가’란 질문에도 “정확하게 기억을 못 하겠다”고 답을 피했다. 이 또한 엠스플뉴스의 지난해 단독보도를 통해 전 교수가 ISU 관계자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 공개된 바 있다.
이날 기자회견을 지켜본 한 빙상인은 “최근 ‘조재범 사건’ 여파로 전 교수의 구속수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기에 한국체대가 전 교수의 안식년을 취소했고, 교육부에서 한체대를 감사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위기감을 느껴 기자회견장에 나온 것 같다”고 의견을 밝혔다. 빙상계에선 “전 교수가 미국에 거주할 집을 알아보고 있다. 수사를 피해 국외 도피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전 교수는 이날 구체적인 증거가 나온 의혹에 대해서는 ‘모른다’로 일관했고, 의혹을 반박할 만한 근거와 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또 젊은 빙상인 연대에 대한 메신저 공격을 통해 물타기를 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보였다.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지만, 결과적으로 ‘검찰 수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결과가 됐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