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상 최초의 성평등 올림픽을 자부하는 2020 도쿄올림픽. 노출 유니폼을 거부하고 성폭력 피해자에 연대하는 등 선수들 사이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지만 젠더 데이터 공백에 무심한 IOC의 문제점은 여전하다.

유니타드 차림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독일 여자 체조 대표팀 선수들(사진=파울린 쉬퍼 SNS)
유니타드 차림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독일 여자 체조 대표팀 선수들(사진=파울린 쉬퍼 SNS)

[엠스플뉴스]

“이 세상이 재현되는 방식은 세상 자체와 마찬가지로 남자들의 작품”이란 시몬 드 보부아르의 통찰은 스포츠, 특히 올림픽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영국의 BBC에 따르면 최초의 근대올림픽인 1896년 아테네올림픽 당시 참가 선수 중에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여성 선수의 올림픽 출전을 금지했다. 4년 뒤 열린 파리올림픽엔 남성 선수 1천여 명에 여성 선수는 단 22명 만이 참가했다.

첫 올림픽으로부터 무려 12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지난달 23일 일본에서 개막한 2020 도쿄올림픽은 아테네올림픽과 비교해 얼마나 달라졌을까. 일단 여성 참가선수 비율만 놓고 보면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한 여성 선수 비율은 전체 선수단의 약 49%로 거의 절반에 가깝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보다 여성 선수가 100명 이상 늘었다.

IOC도 ‘성평등 가치를 올림픽에 반영하겠다’면서 한 세기 전과는 사뭇 달라진 자세를 취했다. 이를 위해 IOC는 양궁, 수영, 트라이애슬론, 1600m 계주 등 총 18개 종목에 혼성 경기를 도입했다. 양궁의 안산 선수가 하계올림픽 사상 첫 3관왕을 차지한 것도 양궁 혼성 종목이 추가된 덕분이었다.

노출 유니폼 거부, 성폭력 혐의자 국가대표 발탁에 항의…젠더 이슈에 민감해진 선수들

올해초 열린 국제대회에 비키니 대신 반바지를 입고 출전했다가 벌금 폭탄을 맞은 노르웨이 비치 핸드볼 대표팀(사진=노르웨이 여자 비치핸드볼팀 SNS)
올해초 열린 국제대회에 비키니 대신 반바지를 입고 출전했다가 벌금 폭탄을 맞은 노르웨이 비치 핸드볼 대표팀(사진=노르웨이 여자 비치핸드볼팀 SNS)

참가 선수들 사이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보인다. 독일 여자체조 대표팀은 이번 도쿄올림픽에 발레 연습복의 일종인 유니타드를 입고 출전했다. 원피스 수영복 형태의 레오타드를 입는 기존 체조선수들과 달리 몸통부터 발목 끝까지 덮는 형태의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독일 대표팀이다. 여성 체조 선수들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이제 그만 끝내자는 취지다.

독일팀 파울린 쉬퍼는 자신의 SNS(사회 관계망 서비스)에 유니타드 착용 샷을 올리며 “우리 팀 새 옷 어떤가요?”라고 물었다. 팀 동료 사라 보쉬는 BBC와 인터뷰에서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안심된다. 모두가 유니타드를 입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유니타드를 입는 게 안전하다고 느낀다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과거 2012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미니스커트 의무화’ 규정을 신설했다가 논란이 됐던 여자 배드민턴 종목의 ‘복장 자유화’도 눈에 띈다. 28일 열린 여자 배드민턴 예선 경기에선 전체 선수의 30%가 반바지, 치마바지, 레깅스, 원피스, 히잡 등 자유로운 차림으로 경기에 나섰다.

이런 변화를 두고 일각에선 노출 여부가 아닌 복장 선택권이 핵심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 전국지 ‘USA 투데이’는 한 기사에서 노출 있는 유니폼이 ‘더 편안해서’ 선호한다는 미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인터뷰를 소개했다. 이들은 “비치발리볼은 반바지나 긴 옷도 입을 수 있다”며 “노출이 적은 유니폼이 더 편한 선수는 그런 유니폼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노출이 심한 유니폼을 남성 선수들은 입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성차별과 성적 대상화로 규정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세계 배드민턴 연맹이 2012년 ‘미니스커트 의무화’를 추진하며 들었던 이유는 ‘배드민턴 인기 향상과 스폰서 유치’였다. 한 체육계 관계자는 “팔락이는 짧은 치마나 비키니에 어떤 기능적 장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남성들로 구성된 체육 단체에서 결정한 복장 규정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지난 18일 불가리아에서 열린 유럽 비치 핸드볼 대회에 비키니 하의 대신 반바지를 입고 출전했다가 유럽핸드볼연맹으로부터 선수 한 명당 150유로(약 20만 원)의 벌금을 부과받았던 프랑스 여자 비치 핸드볼 대표팀 발레리 니콜라스는 “유니폼 때문에 선수들이 희생돼 왔다. 비키니 유니폼은 입었을 때 불편하고, 발가벗겨진 느낌을 받는다. 생리 기간에 특히 불편하다”고 호소했다.

박상현 사단법인 코드 미디어 디렉터도 SNS를 통해 독일 체조 선수들의 유니타드 사진을 소개하며 “여자 선수들이 다리를 벌릴 때마다 카메라 플래쉬 터지는 거 언제까지 할 건가? 다음 올림픽에서는 이게 기본 복장이 되길. 배구, 테니스, 그 외 다 마찬가지”라고 썼다.

미국 펜싱 에페 남자 대표팀의 핑크 마스크 사진을 SNS에 게재한 이브티하즈 무함마드(사진=이브티하즈 무함마드 SNS)
미국 펜싱 에페 남자 대표팀의 핑크 마스크 사진을 SNS에 게재한 이브티하즈 무함마드(사진=이브티하즈 무함마드 SNS)

성폭력 가해자를 국가대표로 선발한 결정을 비판하고,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연대의 메시지를 표현한 선수들도 있다. 미국 펜싱 에페 남자 대표팀 선수 3명은 30일 열린 단체전 16강전 일본전에서 핑크색 마스크를 착용했다. 반면 후보 선수 앨런 하지치만 혼자 검은 마스크를 쓰고 나왔다.

이유는 올림픽을 앞두고 터진 하지치의 대학 시절 성폭력 의혹. 하지치는 5월 미국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을 통과했지만, 얼마 후 여성 3명이 컬럼비아대학 시절인 2013~2015년 하지치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스포츠 인권기구가 조사에 착수했고 대학 시절 관련 문제로 징계를 받았던 사실이 드러났다. 스포츠 인권기구는 6월 선수 자격 잠정 정지 처분을 내렸다.

항소에 이은 징계 해제로 일단 도쿄행에는 성공했지만, 스포츠 인권기구는 하지치와 다른 선수들 간의 접촉을 차단했다. 하지치는 홀로 도쿄에 입성했고 올림픽 선수촌에서 30분 거리 떨어진 호텔에서 혼자 지냈다. 경기 당일 팀 동료가 나눠준 마스크도 하지치의 것만 검은색이었다.

이 장면을 본 미국 여자 펜싱 금메달리스트 이브티하즈 무함마드는 SNS에 “남자 에페팀이 하지치만 제외하고 모두 핑크 마스크를 썼다. 성폭행 피해 여성들에 대한 연대를 보여준 것”이라고 적었다. 결국 하지치는 한 번도 피스트에 오르지 못했고, 미국은 일본에 39-45로 졌다.

IOC, 여성 회장 전무하고 여성 집행위원도 소수…젠더 데이터 공백은 예정된 결과

토마스 바흐(가운데) IOC 위원장이 남성 임원들에 둘러싸여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토마스 바흐(가운데) IOC 위원장이 남성 임원들에 둘러싸여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처럼 젠더 이슈에 민감해진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완전한 성평등까지는 갈 길이 멀다. 캐나다 출신의 세계 정상급 여성 복서 맨디 부졸드는 임신과 출산 기간 대회 성적이 없다는 이유로 올림픽 출전 자격을 뺏길 뻔한 위기를 겪었다.

부졸드는 2018년 딸 출산을 위해 복싱을 쉬었고, 2020년에는 코로나19 사태로 복싱 예선전이 취소돼 경기 출전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IOC는 아메리카 대륙 선수들에게 2018년과 2018년 열린 대회 가운데 3개 대회의 순위를 출전 자격에 반영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부졸드는 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임신 전 기록(세계 랭킹 8위)을 출전 자격으로 인정해 달라고 항소했고, CAS가 이를 받아들였다. CAS는 IOC가 임신 혹은 출산으로 예선을 치르지 못한 여성 선수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해외 선수의 가족 동반 일본 입국을 원천 금지한 IOC의 방침도 마찬가지. 코로나19 방지를 이유로 들었지만, 이 방침으로 인해 젖먹이 아이를 키우는 여성 선수들이 모유 수유와 올림픽 출전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를 두고 선수들과 대중의 반발이 거세지자, 결국 IOC는 젖먹이 자녀를 둔 선수는 아이와 동반 입국을 허용하겠다고 물러섰다.

여성 선수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IOC의 행태는 남성을 디폴트 인간으로 간주하는 젠더 데이터 공백의 문제를 잘 보여준다. BBC에 따르면 국제 스포츠 관련 결정권을 지닌 IOC 집행위원 가운데 33.3%만이 여성이고, 전체 위원 구성에서도 37.5%가 여성이다. 여성 회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대회 개막을 앞두고는 일본의 올림픽 고위 인사들이 여성 혐오 발언으로 줄줄이 사퇴하는 사태를 빚었다. 모리 요시로 전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장은 지난 2월 “여성이 많으면 회의 시간이 길어진다”는 발언이 문제가 돼 사임했다. 개·폐회식 총괄 책임자 사사키 히로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여성 연예인의 외모를 비하했다가 자리에서 내려왔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걸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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