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암 고려용접봉 부회장(사진=엠스플뉴스 강명호 기자)
최희암 고려용접봉 부회장(사진=엠스플뉴스 강명호 기자)

[엠스플뉴스]

1990년대 초, 중반은 그야말로 농구대잔치의 시대였다. 실업팀들과 대학 농구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웅을 겨루며 한국 농구계에 부흥을 일으켰다. 그 중심에는 대학팀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한 연세대학교가 있었다.
연세대는 1993-1994시즌 첫 우승을 기점으로 1997-1998, 1998-1999시즌 왕좌의 자리에 등극했다. 농구대잔치에서 최강의 전력을 구축했던 기아자동차에 대적하며 1990년대 세 차례 우승의 영광을 누렸다. 당시 연세대 황금기를 이끌었던 감독은 바로 최희암(66) 고려용접봉 부회장이었다.
1986년 감독 대행으로 연세대 지휘봉을 잡았던 최 부회장은 17년간 한 길을 우직하게 걸으며 팀을 진두지휘했다. 최 부회장은 전력 강화를 위해 선수 스카우트에 주안점을 두었고 출중한 기량을 갖춘 서장훈,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등을 데려왔다. 탁월한 리더십을 앞세워 개성 강한 선수들을 팀에 녹아들게 하였고 조직력을 극대화했다. 실업팀들이 농구대잔치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룬 최 부회장의 지도력은 당대 최고였다.
연세대 황금기를 뒤로 한 채 최 부회장은 프로농구단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2년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를 거쳐 2006년에는 인천 전자랜드 수장을 맡았다. 하나, 2009년 전자랜드와의 동행이 종료된 후 더 이상 농구계에서 최 부회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최 부회장은 곧바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비금속 제조 회사인 고려용접봉에서 일을 시작했고 현재 부회장으로서 수도권과 지방을 오가며 현장 업무를 면밀히 점검하고 있다. 지휘봉을 내려놓은 지 어느덧 12년. 최 부회장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은 체육관이 아닌 제조업 회사 현장이었다.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최 부회장과 나누어 보았다.
Q. 농구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1968년 중학교 1학년 때 시작한 것 같아요. 농구부장이었던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처음 농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Q. 연세대 농구팀에서 선수로 활약을 했었습니다.
정기 연고전에서는 주전으로 많이 뛰었고 2학년 때까지는 나름 주전 자리에 있었어요. 수비를 상당히 독하게 했는데 열심히 한 결과라고 봐요. 당시에 원체 쟁쟁한 동기들과 후배들이 많았어요. 2학년 끝날때 쯤 되니 1학년 후배들이 많이 성장해서 주전 자리에서 밀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않고 열심히 했어요. 3, 4학년 때는 주전 선수들이 대표팀에 나가고 하니깐, 제가 나름대로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Q. 20대(28세)에 선수 생활을 마감한 이유가 있었나요?
당시 현대 전자 농구단에 입단했고 일 년 만에 군대를 갔어요. 원래 제대를 하면 은퇴하려 했는데, 팀에서 일 년 정도 더 뛰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때 이충희, 이원우가 신입으로 들어왔는데 팀에서 저한테 선배로서 관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었죠. 당시 추세로 보면 남보다 빨리 은퇴를 한 것도 아니고 늦게 한 것도 아니었어요. 프로팀이 없었기 때문에 군대를 다녀오고 빨리 현업으로 돌아가는 것이 장래에 더 좋았죠. 팀에서 일 년간 선수 생활했을 때는 사실상 선수보다는 플레잉코치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Q. 되돌아본다면, 어떤 선수였나요?
재능은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았지만,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 잘 못 해도 포기를 하기보다 한 번 더 해보려는 욕심이 있었죠. 사실 감독 입장에서는 그런 선수가 제일 어려워요. 재능이 없으니 빨리 정리하면 다른 선수들에게 기회를 줄 텐데 말이죠. 그래도 팀에 필요했던 선수라고 생각해요.
Q. 은퇴 후 4년 뒤(1986년)에 연세대 감독을 맡게 되었어요.
은퇴하고 현대 건설에서 근무하는데 이라크 현장에 있었어요. 그때 이란, 이라크에 전쟁이 잦았고 아버지께서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죠. 학교 선생님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귀국을 했어요. 그리고 학교를 찾아갔는데 농구 감독 선생님이 없었어요. 정기 연고전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때 체육부장님이 제가 맡았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후임 감독이 올 때까지 하겠다고 했었죠.
Q. 서장훈, 이상민, 문경은 등 화려한 선수들이 팀의 주축이었습니다. 남다른 리더십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신촌에 있는 학교를 나가면 바로 앞이 유흥가에요. 보통 오후 4시에 훈련을 시작해서 7시에 마치고 저녁을 먹고 나면 자유 시간이에요. 저는 선수 시절에 선배들이 후배들을 데리고 술 먹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우리 애들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저희는 일반적으로 하지 않고 철저히 관리했어요. 야간 훈련을 했고 탈선 같은 건 없었어요. 1, 2학년들이 대학이라는 자유로움을 꿈꾸고 들어왔다가 규율에 맞게 생활을 하다 보니 힘들어했어요. 신입 선수들이 잘못을 하면 주로 선배들에게 야단을 쳤죠. 책임을 지라는 의미였어요. 개성들이 아주 강했는데 대부분 고학년이 되면 팀에 녹아들어요. 그런 것들이 관리하는 요령이었죠.

최희암 고려용접봉 부회장(사진=엠스플뉴스 강명호 기자)
최희암 고려용접봉 부회장(사진=엠스플뉴스 강명호 기자)

Q. 연세대 농구팀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실감했나요?

당시에는 잘 몰랐어요. 매일 훈련, 경기, 선수 스카우트를 신경 쓰느라 몰랐죠. 돌이켜보면 선수들이 팬레터도 많이 받았고 인기가 좋았다는 걸 느껴요. 저는 감독이어서 그런지 실감을 못 했어요.
Q. 선수들의 대학 시절이 궁금합니다.
이상민은 1학년 때부터 성실 그 자체였어요. 플레이에 대해서는 코치의 자문이 필요했겠지만, 사생활은 건드릴 것이 거의 없었어요. 그 정도로 성실하고 자기 관리를 잘했어요. 선생님 말도 잘 들었죠. 그런 선수들을 대할 때는 너그러울 때가 있어요. 잘못을 하더라도 격려를 해주고 웃으면서 대했어요. (문)경은이는 공부를 상당히 잘했고 영리했어요. 지적인 면도 있었죠. 물론 놀기도 좋아하고 화끈한 면도 있었어요. 서장훈은 처음에 약간 힘들어했지만, 한 학기 지나고 나니 궤도에 올랐고 나중에는 선, 후배들하고 잘 지냈어요. 선수들은 힘들어도 자기들끼리 잘 뭉치고 그런 부분들이 있었어요.
Q.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는 누구있나요?
대답하기 어렵네요. 오히려 잘 안 된 제자들이 생각나요. 잘 된 애들은 원체 잘했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어요. 4년간 노력하고 본인들이 규율을 잘 지키며 지냈죠. 지금도 생각해보면 잘 안 된 제자들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Q. 이제는 감독으로서 팀을 이끌고 있는 제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현역 시절 때 잘했던 선수들이 지금 감독을 하고 있는데, 흐뭇하고 좋아요. 잘했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기준으로 자꾸 선수를 보면 잘 안 될 수 있어요. 염두에 둬야 하는 부분이에요. 선수가 안 되는 것을 그 선수의 입장에서 보면 지도할 수 있는 요령이 생길 거에요. 인내를 가지고 선수가 성장할 때까지 기회를 줘야 해요. 그리고 짜증을 내지 말아야죠.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면 안 돼요.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해요.
Q. 연세대에서 어떤 농구를 추구하셨나요?
첫 번째는 '깨끗한 플레이를 하자'고 강조했어요. 페어플레이를 상당히 강조했고 더티플레이에 대해 주의를 시켰어요. 페어플레이를 하는 도중 결과가 안 좋더라도 그건 결과의 문제지 우리가 잘못한 건 아니죠. 그런 농구를 강조하고 좋아했어요. 두 번째는 선수들이 자신의 포지션에서만큼은 최고의 선수가 되길 원했어요. 기술자도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지 않으면 밀리게 되어있어요. 자신의 포지션에서 최고가 되어야 선배를 따라잡을 수 있고 후배에게 밀리지 않아요. 그 점을 강조했는데 나중에는 분업 농구라고 평가를 받기도 했죠.
Q. 17년 동안 엄청난 성과를 거뒀습니다. 떠오르는 영광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농구대잔치 첫 우승이었어요. 농구대잔치에 대학리그 1위로 초대를 받지는 못했어요. 네 팀이 올라가는데 저희가 3위를 했죠. 선수들 실력은 좋았는데 팀워크가 안 맞았어요. 그래서 그때 고려대학교 이우주 선생님이 팀에 오셔서 선수들과 대화도 하고 피드백을 받았죠. 맨날 제가 지도하는 것보다 외부의 도움을 받은 것이 효과적이었어요. 속공 혹은 완벽한 찬스가 아니면, 공을 최소한 네 번 혹은 다섯 번을 만지고 공격을 하라고 지시했죠. 단순한 거지만, 그게 잘 맞아떨어져서 우승도 했어요. 좋은 선수가 있는데 우승을 못 하면 힘들어요. 그걸 극복해서 상당히 보람이 있었죠.

최희암 부회장의 전자랜드 감독 시절(사진=KBL)
최희암 부회장의 전자랜드 감독 시절(사진=KBL)

Q. 연세대 황금기를 뒤로하고 2002년 모비스 사령탑에 부임하게 됩니다. 예상보다 늦은 시기에 프로팀 지휘봉을 잡았어요.

그때는 꼭 프로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대학에서 끝까지 정년으로 있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당시 모비스 직장에서 근무하던 대학 동기들이 감독을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대학 감독으로서 성과를 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프로와 연봉이 4, 5배 정도 차이가 나니깐 모비스로 가게 되었죠.
Q. 프로 감독과 대학 감독은 어떤 차이점이 있었나요?
프로에서 3, 4년 정도 코치 생활을 하고 감독을 했다면 좀 더 잘했을 것 같아요. 대학에서 했던 스타일을 프로에 가서 그대로 하다 보니 파악을 못 했죠. 대학 때는 선수들 관리를 안 해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프로는 아니에요. 스스로 관리를 하더라고요. 그런 부분을 놓쳤죠. 대학에서는 주로 조직력을 강조하고 몇몇 선수에 의존하지 않는 다섯 명 모두가 할 수 있는 플레이를 선호했는데 프로는 외국 선수를 활용하는 농구를 하잖아요. 그리고 외국 선수를 뽑는 기준과 활용법도 부족했어요. 책임은 감독이 져야 하니깐 결과에 대한 부담도 너무 컸죠. 항상 승리하던 입장이었는데 프로에서 시행착오를 거치고 실패하다 보니 나름 의기소침했던 부분도 있었어요. 그 부분들이 달랐다고 생각해요.
Q. 모비스 이후 전자랜드(2006-2009) 감독을 맡으며 다시 프로에 도전했습니다. 성공에 대한 열망이 컸을 것 같아요.
모비스와 전자랜드를 맡았을 때 팀이 최하위였어요. 팀 승률이 굉장히 안 좋았고 모비스와 전자랜드 모두 패배에 익숙했어요. 선수들이 의도한 건 아니에요. 분위기 자체가 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바꿔야 했어요. 그래서 분위기 쇄신을 위해 선수들 트레이드도 많이 했고 전자랜드 구단에서 많이 배려해주고 지지를 해줘서 나름대로 성과는 있었다고 생각해요. 두 시즌은 플레이오프 진출을 못 했지만, 세 번째 시즌에서 진출에 성공했죠. 그때 전주 KCC와 몸싸움도 하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고비를 넘겼으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두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아쉬워요.
Q. 현재는 제조업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저희가 제조업 회사라서 물건을 팔고 이윤을 남겨야 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작년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죠. 매출과 생산성이 떨어지면서 여러 부분에서 어려워요. 힘든 부분들을 하나씩 이겨내 가고 있어요. 다행히 회사에 좋은 직원들이 많아서 현명하고 지혜롭게 극복하고 있습니다.
Q. 농구계를 떠나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계기가 있었나요?
2009년에 전자랜드 3년 계약을 마치고 재계약을 못 했어요. 그때 고려용접봉 회장님께서 용접봉 영업을 한번 해보라고 하셔서 고심 끝에 회사에 가게 되었죠. 저도 선배들, 주변 사람들과 상의를 해봤고 '그만큼 했으면 됐다. 일을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라고 생각했어요.
Q. 힘들었던 점이 있었을 것 같아요.
다 어려웠죠. 어려웠는데, 도와준 사람들이 많았어요. 중국에 가보니깐, 인력이 좋았어요. 영업하는 직원들부터 공장 관리를 하는 직원들까지 모두 좋았고 저는 용접봉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갔기 때문에 직원들의 의견을 많이 들었어요.

현장 업무를 점검하는 최희암 부회장(사진=엠스플뉴스 강명호 기자)
현장 업무를 점검하는 최희암 부회장(사진=엠스플뉴스 강명호 기자)

Q. 중국법인 사장에서 본사 부회장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새로운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돌이켜보면 결국 열정이었던 것 같아요. 처음 32세에 연세대 감독을 맡았을 때도 아무것도 몰랐고 '계란에 바위 치기'식으로 부딪혔죠. 무모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열정이 있었어요. 일할 때도 그렇게 했고 열심히 했어요. 성실하게 하고 포기하지 않았죠.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위에서 도움을 받았어요. 제가 남들보다 특별히 잘났거나 비결, 요령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열심히 했다고 생각해요.
Q. 지도자 경험이 회사 업무에 도움이 된 것이 있었나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상당히 도움이 됐죠. 운동 경험은 손해 볼 게 없어요. 영업할 때 거래처를 방문하면 낯이 익은 사람이 오니깐, 어색함이 없어요. 나름대로 절반 정도는 호감을 느끼고 봐요. 직원들은 제가 운동선수 출신이다 보니, 실수를 하더라도 이해해줘요. 농구를 할 때 감독과 선수들이 있듯이, 직장에는 팀장과 팀원들이 있잖아요. 거의 비슷해요. 선수들이 잘하면 팀 성적이 좋아지듯이, 팀원들이 잘해주면 성과가 올라요. 그런 부분이 일맥상통한다고 봐요.
Q. 지난 시즌 팬서비스 논란이 있었을 때, 과거에 “너희들이 볼펜 한 자루라도 만들어봤냐?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하는데도 대접받는 이유는 팬들이 있어서다. 팬들에게 잘해라”라고 했던 멘트가 화제가 되었어요.
그건 그냥 기본입니다. 저는 대학에서 선수들을 지도할 때 그걸 기본으로 가르쳤죠. 스포츠라는 것이 팬이 없으면 그게 무슨 스포츠입니까. 농구는 당연히 팬이 따르는 종목이죠. 팬을 무시하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실질적으로 선수들이 돈을 버는 것은 생산성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선수들은 돈도 많이 벌고 가치가 있어요. 땀을 흘려서 성과를 냈고 그것에 대한 인정을 해주는 거예요. 어린 팬들은 선수들을 모범 케이스, 롤모델로 삼을 수 있잖아요. 제가 했던 말은 당연한 것이고 항상 하는 얘기였어요. 관중들에게 팬서비스를 해줄 필요가 있는데 그걸 안 한거죠. 체계적인 교육을 한다면, 그런 일은 나오지 않을 거예요.
Q. 농구는 어떤 존재입니까.
제 인생에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농구 덕분이죠. 지금은 농구에 신경을 쓸 수 없고 여기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깐 현업에 집중해야죠. 농구는 제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버팀목이라고 생각해요.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회사에서 은퇴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일할 겁니다. 직장 후배들이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게 뒤에서 서포트해 주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봅니다.
Q. 마지막 인사 부탁드립니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모두가 어렵습니다. 파도가 칠 때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듯이, 우리도 반드시 오르막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다 같이 극복해서 즐거운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윤서 기자 fallininvon@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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