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프로 데뷔 김영환, 2020-2021시즌도 문제없다

-“힘겨웠던 집안 사정, 농구로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꿈을 꿨다”

-“2007년 신인선수 드래프트, 솔직히 4순위 안에 뽑힐 줄 알았다”

-“독일에서 무릎 수술받게 해준 추일승 감독님 아니었다면 일찍 은퇴했을 것”

-“KT 주장 김영환의 무기? 성실함 딱 하나 있다”

부산 KT 소닉붐 김영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부산 KT 소닉붐 김영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수원]

‘소리 없는 강자’

농구계는 김영환(36·195cm)을 이렇게 부른다. 김영환이 폭발적인 득점력과 화려한 드리블로 농구계 눈을 사로잡는 선수는 아니다. 하지만, 팀엔 꼭 필요한 선수다. 팀이 필요로 할 때 득점하고 리바운드를 잡아주는 선수다.

김영환은 일찍이 두각을 나타낸 재능이기도 하다. 김해가야고 시절엔 ‘득점기계’로 이름을 알렸다. 농구계가 황금세대로 표현한 2007년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선 1라운드 8순위로 대구 오리온스의 지명을 받았다. 두 차례 트레이드 끝 부산 KTF 매직윙스(부산 KT 소닉붐의 전신)로 향한 김영환은 묵묵히 제 역할을 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김영환, 김태술(1순위), 양희종(3순위), 정영삼(4순위), 함지훈(10순위), 송창무(14순위) 등 2007-2008시즌 프로에 데뷔한 선수는 지금도 좋은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김영환은 프로 지명이 예상보다 늦었다은퇴는 가장 늦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엠스플뉴스가 프로 14번째 시즌을 준비 중인 김영환의 얘기를 들어봤다.

축구부였던 김영환, ‘호기심’에 농구공 잡았다

부산 KT 소닉붐 주장 김영환 프로 통산 기록(표=엠스플뉴스)
부산 KT 소닉붐 주장 김영환 프로 통산 기록(표=엠스플뉴스)

2007-2018시즌 프로에 데뷔해 14번째 시즌을 앞두고 있습니다.

2007년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현장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엊그제 일 같아요. 벌써 14번째 시즌을 앞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웃음).

14번째 시즌 준비는 계획대로 진행 중입니까.

지난 시즌을 마치고 발목 수술을 했어요. 5월까진 재활에 매진했죠. 팀이 6월 1일부터 새 시즌 준비를 시작했어요. 전 6월 중순부터 팀에 합류해 몸 상태를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훈련을 소화하고 경기를 치르는 데 문제없는 상태에요. 후배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죠(웃음).

발목은 지난 시즌 중 다친 겁니까.

부상을 당한 건 아니에요. 오래 뛰었습니다. 쌓이고 쌓인 거죠(웃음). 병원에서 ‘뼛조각이 생기고 그 뼈가 자라고 있다’는 얘길 들었어요. 뼛조각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지난 시즌 종료 후 수술대에 올랐죠. 만족합니다.

발목 통증이 완전히 사라진 겁니까.

이젠 뛸 수 있는 날보다 뛴 날이 더 많아요.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경기력을 보이기 위해선 완벽한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수술과 재활을 마치니 통증이 많이 사라졌어요. 이전엔 움직일 때마다 불편했습니다. 팀 훈련 잘 소화하면서 지난 시즌보다 좋은 경기력을 보일 일만 남았어요.

머릿속이 농구 생각뿐인 것 같습니다. 올해로 프로 13년 차입니다. 지금도 농구가 재밌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어릴 땐 살기 위해서 농구를 했어요. 학창 시절 농구 하면서 재미를 느껴본 적은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어요. 힘들었죠. 전 농구로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게 소원이었죠(웃음). 운동부 문화도 농구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요인 중 하나였어요. 제가 운동하던 시절엔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습니다. 솔직히 구타도 잦았죠. 우린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습니다. 이걸 버텨야 성공한다고 배운 거죠. 또 있습니다.

어떤?

몸이 많이 약했어요. 자주 다치고 아팠죠. 당시엔 정상적인 치료나 재활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상태가 아닌 이상 아픈 건 참고 뛰었어요. 농구부 감독님에게 ‘아프다’고 말하는 것부터 어려웠습니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죠. 전 아무리 아파도 얘기한 적이 없어요. 무서웠습니다. 참고 뛰었죠. 농구가 재밌기 어려운 환경이었어요(웃음).

초등학교 4학년 때 농구공을 처음 잡아본 김영환(사진=엠스플뉴스)
초등학교 4학년 때 농구공을 처음 잡아본 김영환(사진=엠스플뉴스)

농구공을 처음 잡은 건 정확히 언제부터입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운동을 했어요. 처음부터 농구부를 선택한 건 아닙니다. 학교에 축구부가 있어서 공을 좀 찼어요(웃음). 후배들이 축구부 출신이란 사실을 믿지 않는데 사실입니다.

후배들이 왜 안 믿습니까.

가끔 축구를 하는데 활약이 저조해요(웃음). 어릴 땐 참 잘했었는데...

축구부에서 농구부로 넘어간 계기가 있습니까.

키가 컸어요. 평소처럼 수업을 듣고 있는데 반에서 키가 큰 학생 두 명씩을 교무실로 부르는 거예요. 갔죠. 체육 선생님이 대뜸 ‘농구 해볼 생각 없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땐 농구란 게 뭔지도 몰랐어요(웃음).

축구부 생활을 이어간 겁니까.

어릴 땐 호기심이 많잖아요. 농구가 어떤 스포츠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농구를 하려면 학교를 옮겨야 했어요. 옆 학교로 전학을 가서 농구 선수의 길을 걸어야 했죠. 어떤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농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말했죠. ‘나 농구 할래’라고.

부모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농구공을 잡아 본 적 없는 아이가 농구부에 든다고 하니 당황하신 거죠. 심지어 전 축구부 생활을 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계속해서 농구를 하고 싶다고 하니 ‘한 번 해보라’고 했어요. 여기엔 한 가지 조건이 붙었습니다. 전학을 선택한 만큼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죠.

학교를 옮겨 농구부에 들었습니다. 처음 접해본 농구, 어땠습니까.

제가 생각했던 농구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처음엔 기본기 훈련만 했어요. 경기하고 싶은데 기초 드리블, 패스만 했죠. 1주일 만에 부모님에게 ‘그만둔다’고 했다가 엄청나게 혼났습니다(웃음). 다시 농구부로 돌아와 농구를 했죠. 당시만 해도 평생 농구를 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2007년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한 가지 후회되는 게 있습니다”

김해에서 득점기계로 이름을 알렸던 김영환(사진 가운데)(사진=엠스플뉴스)
김해에서 득점기계로 이름을 알렸던 김영환(사진 가운데)(사진=엠스플뉴스)

학창 시절 김영환은 어떤 선수였습니까.

운동신경이 있었습니다. 처음 농구를 시작한 초등 4년부터 곧잘 했죠(웃음). 그러던 중 중학교 2학년 때 시련이 찾아들었어요. 무릎이 매일 아팠습니다. 제가 김해에서 농구를 했어요. 동네 병원에선 ‘괜찮다’는 말만 했죠. 참고 뛰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키가 자라지 않는 것도 고민이었죠.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시간이 해결해줬어요. 1년 후부터 키가 확 컸습니다. 개인적으론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어요.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게 있었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몸이 받쳐주질 않으며 아무 소용 없다는 거예요. 나보다 빠르고 힘 좋은 선수들이 즐비했습니다.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부상 빈도를 줄이고 몸을 키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했죠.

효과가 있었습니까.

지금처럼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은 게 아니에요. 동네 헬스장에서 운동했습니다. 헬스장 관장님에게 기초 자세를 배웠죠.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고교 시절부터예요. 기술이 하나둘 통하기 시작했죠. 점프력도 몰라보게 좋아지면서 덩크슛이 가능해졌습니다. 자신감이 붙었죠. 그때부터 KBL 도전에 대한 꿈을 꾼 것 같아요.

실제로 김해가야고 시절 ‘득점기계’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안양 KGC 인삼공사 포워드 양희종과 라이벌로도 유명했죠.

득점기계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농구 했어요. 김해가야고 농구부엔 딱 6명이 있었습니다. 선수가 없어서 수비 훈련을 못 해요. 실전에서도 수비를 강하게 안 했습니다. 혹시라도 5반칙 퇴장당하면 큰일 나니까. 감독님은 ‘우린 공격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며 공격 농구를 주문했죠(웃음).

프로 진출을 확신한 계기가 있습니까.

고교 3학년 때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어요. 청소년 대표팀에 뽑혔죠. 그곳에서 저와 신인 드래프트에서 경쟁할 선수들을 만났습니다(웃음). 농구를 정말 잘했어요. 하지만, 그 안에서 희망을 봤습니다. 12명 안에 뽑힌 거예요.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는 2, 3라운드의 기회도 있으니 프로엔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2007년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에 참여한 선수들을 ‘황금세대’로 부릅니다.

쟁쟁하죠. 당시 1순위 김태술, 양희종(3순위), 정영삼(4순위), 함지훈(10순위) 등은 지금도 좋은 기량을 유지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선수들과 경쟁에서 밀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좋은 경쟁을 이어가면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싶었죠. 그래서 대학교 땐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데 힘썼어요.

부족한 부분이요?

고교 시절 선수가 부족해 정상적인 훈련을 못 했습니다. 수비 훈련은 아예 못 했죠. 자기 역할에 충실하는 분업 농구도 대학교 때 다시 배웠어요. 고교 시절까진 제가 공을 잡고 공격하면 동료들이 공간을 만들어줬습니다. 대학은 달랐죠. 제가 빈 곳을 찾아 움직여야 공을 받을 수 있었어요.

농구계는 “김영환은 대학 시절 부상이 잦았다”고 기억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쳐서 아픈 게 아니에요. 농구공을 잡은 뒤 다친 곳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게 쌓이면서 잦은 부상으로 이어졌죠. 대학 입학 후에 병원에서 정밀 검진을 처음 받아봤어요. ‘연골이 푹 파여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 재활이 필요하다고 했죠. 학창 시절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게 참 아쉬워요.

잦은 부상도 김영환의 농구 열정과 재능은 막지 못했습니다. 쟁쟁한 선수가 즐비했던 2007년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몇 순위를 예상했습니까.

솔직히 4순위 안엔 무조건들 줄 알았어요. 기대가 있었죠. 그런데 주변에서 이런 얘길 들었어요. ‘김영환이 성장 가능성은 있지만 무릎이 너무 안 좋다’였죠. ‘프로에서 오래 못 뛸 것’이란 얘기도 들었어요.

2007년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8순위로 프로에 입문한 김영환(사진 왼쪽)(사진=KBL)
2007년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8순위로 프로에 입문한 김영환(사진 왼쪽)(사진=KBL)

2007년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8순위로 프로에 입문했습니다. 대구 오리온스(고양 오리온의 전신)에 지명된 후 트레이드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인천 전자랜드의 전신)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한 가지 후회하는 게 있어요. 오리온의 지명을 받은 제 표정이 안 좋았습니다. 일찍 프로 지명을 받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던 만큼 실망이 컸죠.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표현해선 안 됐어요. 실망감을 얼굴에 드러낸 것 같아 죄송합니다.

오리온의 지명을 받고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농구계 평가를 뒤집기 위해선 무조건 ’롱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동기들보다 하루라도 더 선수 생활을 하겠다’는 목표를 잡았죠(웃음). 아주 독하게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안 좋은 상황에 좌절하기보단 어떻게든 바꿔보려는 편입니다. 그런 게 14번째 시즌을 앞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신인선수 드래프트에 참여한 선수에게 지명 순위는 얼마만큼 중요한 겁니까.

자존심이에요. 프로의 세계에서 연봉은 아주 중요합니다. 내가 값어치 있는 선수라면 높은 연봉을 받아요. 김영환이란 선수의 가치를 연봉으로 나타내는 거죠. 신인 드래프트 순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더 뛰어난 기량을 보여줬다면 일찍 지명받았을 거에요.

첫 시즌을 앞두고 또 한 번 트레이드가 됐습니다.

프로 데뷔를 앞두고 전자랜드에서 KTF 매직윙스(부산 KT의 전신)로 옮겼죠. 첫 시즌을 경험하기 전이었습니다. 큰 느낌은 없었어요. 어디서든 내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생각뿐이었죠(웃음).

“추일승 감독님이 아니었다면 일찍 은퇴했을 겁니다”

김영환의 막내 시절(사진 왼쪽)(사진=KBL)
김영환의 막내 시절(사진 왼쪽)(사진=KBL)

프로 입문 전인 2006-2007시즌 KTF 매직윙스는 챔피언 결정전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프로 입문 후 팀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2007-2008시즌은 8위, 2008-2009시즌엔 최하위(10위)를 기록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내국인 선수들이 부족했던 것도 있지만 운도 따르지 않았어요. 구단이 선택한 외국인 선수들의 몸이 안 좋았습니다. 그걸 구단은 몰랐죠.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A란 선수가 있습니다. 유럽에서의 경력이 화려해요. A와 협상을 진행했고 영입을 확정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훈련해보니 양쪽 무릎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부상을 숨기고 온 거군요.

그런 선수가 한 명이 아니었어요. 직전 시즌 챔피언 결정전 준우승팀이 반등하지 못한 이유죠. 2년 차 시즌(2008-2009)엔 수술했어요. 여기서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당시 팀을 이끈 추일승 전 감독님이 아니었다면 일찍이 은퇴했을 거예요.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이유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추일승 감독님이 학창 시절부터 좋지 않은 연골을 수술받을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한국 병원에서 원인을 찾지 못하니까 미국과 독일 병원을 알아봐 주었죠. 독일에서 검사받고 수술했습니다. 연골이 움푹 파여 있어서 매우 안 좋은 상태라고 했죠. 그리고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수술로 100% 회복은 어렵다. 난 최선을 다하겠다. 너도 최선을 다해라. 그럼 90%까진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죠. 말 한마디를 해도 따뜻했어요. 또 희망을 줬죠. 재활할 때도 신경을 끊지 않았습니다.

재활은 어느 정도 했습니까.

독일에서 한 달 반 했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3, 4개월 더 했죠.

다시 코트에 선 날을 기억합니까.

정확한 날짜는 기억 못하지만 서울 SK전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통증이 다 없어진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관중의 함성이 끊이지 않는 곳에서 농구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주 좋았어요.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특히나 농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예년보다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조)성민 형과 트레이드, 변화가 있을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2012-2013시즌 창원 LG 세이커스로 둥지를 옮긴 김영환(사진=가운데)(사진=KBL)
2012-2013시즌 창원 LG 세이커스로 둥지를 옮긴 김영환(사진=가운데)(사진=KBL)

2012-2013시즌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유니폼을 바꿔입습니다.

창원 LG 세이커스로 둥지를 옮겼죠. 예상했어요. 전역 후인 2011-2012시즌 말미 팀에 합류했습니다. 팀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어요. 팀은 4강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졌죠. 주변에서 ‘팀에 변화가 있을 것’이란 얘길 많이 들었어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마음의 준비를 해도 3시즌 반을 뛴 팀과 이별이었습니다.

힘든 게 없었던 건 아니에요. 함께 생활한 동료들과 헤어진다는 건 쉽지 않았죠. 그리고 한 가지 다짐했어요. 제가 KT에서 계속 잘했다면 트레이드 카드로 쓰이지 않았을 겁니다. 예년보다 운동에 집중해 KT가 후회하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LG와 인연도 남다릅니다. 2012-2013시즌부터 4시즌 반을 LG에서 뛰었습니다.

LG가 리빌딩에 집중한 시기였습니다. 김 진 감독님이 ‘젊은 선수들을 잘 이끌어달라’면서 주장을 맡겼어요. 실전에서 큰 부담 없이 플레이할 수 있게 믿어줬죠.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특히나 2013-2014시즌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LG가 처음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시즌이군요.

통합우승을 눈앞에서 놓친 시즌이죠(웃음). 농구가 아주 재밌게 느껴진 시즌이었어요. 매일 웃으면서 운동했죠. 이 시즌이 LG에서 뛴 4시즌 반 가운데 평균 출전 시간이 가장 적어요. 45경기 평균 13분 24초를 뛰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어요.

농구 열정이 뛰어난 선수입니다. 2013-2014시즌 평균 출전 시간은 프로 데뷔 후 가장 적은 출전 시간이기도 합니다.

좋은 선수가 많았어요. 제 포지션엔 (문)태종이 형이 있었죠. 포인트 가드엔 (김)시래, 센터엔 (김)종규가 버텼고요. 어느 팀을 만나도 이긴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팀에 자신감이 넘쳤어요. 경기엔 많이 뛰지 못했지만 주장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팀이 흔들리지 않고 쭉쭉 나아갈 수 있게 솔선수범했죠. 그 시즌에 우승을 해야 했는데...

챔피언 결정전이요?

통합우승을 의심하지 않았어요. 팀 분위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시래가 부상으로 빠진 게 아쉬웠어요. 팀이 2승 1패로 앞서다가 뒤집혔죠. 매 경기 열광적인 응원을 보내준 창원 팬들의 바람을 이뤄드리지 못해 죄송했어요.

농구 인생에서 LG는 어떤 팀입니까.

프로농구 선수로 몸이 가장 좋은 시기를 LG에서 보냈습니다. 전성기를 보낸 팀이죠(웃음). 솔직히 LG에서 은퇴할 줄 알았어요. 마지막 팀이란 각오로 뛰었는데...

2017년 1월 31일 LG가 1라운드 지명권을 KT에 넘기는 대가로 조성민과 트레이드가 됩니다. 조성민은 KT의 상징으로 한국 농구 대표팀 주전 슈터로 활약한 선수죠.

KT에서 LG로 트레이드됐을 땐 덤덤했어요. 정든 동료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운 걸 빼면 크게 힘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트레이드는 달랐어요. 일단 상대가 (조)성민이 형이었습니다. 상상도 못 했어요. 성민이 형은 살아있는 전설입니다. KT에서 성민이 형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겠냔 걱정이 컸어요. 농구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큰 부상도 여러 번 이겨냈습니다. 그것보다 조성민과 트레이드 이후가 더 힘들었다는 겁니까.

수술하고 긴 시간 재활에 몰두할 때도 묵묵히 했습니다.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성민 형과 트레이드는 달랐습니다. 성민이 형의 자리를 메워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 컸어요. 조금이라도 부진한 날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죠. 태어나서 처음 수면유도제를 먹고 잤습니다. 그거 없인 잠을 못 잔 거예요.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가족이죠. 저보다 아내가 더 힘들어했어요. 아내가 기사나 댓글을 찾아보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데 매일 안 좋은 기사와 댓글만 나오니깐 속상해했죠. 힘들어하는 저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요. 그런 아내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던 것 같습니다. ‘가장으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며 이를 악물었죠.

KT는 친정으로 돌아온 김영환에게 주장을 맡겼습니다.

그만큼 성실하다는 뜻 아닐까요(웃음). 아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후배들이 믿고 따를 수 있게끔 코트 안팎 생활에 신경 쓰고 있어요. 주장이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습니다. 서동철 감독님도 과거처럼 강압적인 말보다 먼저 훈련장에 와서 땀 흘리는 등의 행동으로 팀을 이끌어주길 원하세요. 그런 부분이 잘 맞아 주장직을 계속 맡은 게 아닌가 싶어요.

“김영환의 무기는 성실성 하나입니다”

부산 KT 소닉붐 포워드 김영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부산 KT 소닉붐 포워드 김영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새 시즌을 앞두고 있습니다. KT는 2018-2019시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허 훈, 양홍석을 중심으로 화끈한 공격 농구를 펼치며 정상 도전을 꿈꾸고 있습니다.

(허) 훈이, (양)홍석이는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더 놀라운 건 그런 친구들이 훈련에서도 틈을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남들보다 1분이라도 더 땀 흘리려고 하죠. 농구 잘하는 친구들은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웃음). 주장으로서 이 친구들에게 특별히 해줄 말은 없습니다. 알아서 잘하는 친구들이니까. 다만.

네.

젊어요. 분위기가 좋을 땐 어느 팀을 만나도 이길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놀라운 경기를 펼치죠. 반대로 안 풀릴 땐 너무 안 됩니다(웃음). 꾸준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게 훈이나 홍석이뿐 아니라 KT의 과제이지 않나 싶어요.

2007년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아직 유효합니까.

농구에 눈을 뜬다는 말이 있습니다. 은퇴할 시점이 다가오니까 농구가 보이기 시작해요(웃음). 농구가 재밌는 겁니다. 이젠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운동하고 싶어요. 전 화려한 드리블이나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농구계 눈을 사로잡은 선수가 아닙니다. 득점, 수비, 리바운드 등 묵묵히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 덕분에 여기까지 왔죠. 그렇게 쭉 해나가고 싶어요. 웃으면서. 그리고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습니다.

어떤?

가족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갈수록 느낍니다. 아내가 저와 결혼하면서 자기 꿈을 포기하고 제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어요. 아주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저는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할 거예요. 농구계가 ‘후배들이 믿고 따랐던 선수’로 기억할 수 있도록 땀 흘리겠습니다. 그럼 아내와 아이들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요(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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