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열린 올림픽 예선 라운드 미국전, 한국은 힘에서도 밀리고 정보전에서도 뒤처졌다

-강속구 앞세워 탈삼진 쇼 펼친 미국, 타선도 홈런 2방으로 가볍게 역전

-수비 시프트 백발백중, 한국 좌타자 완벽 봉쇄

-데이터 혁명 이후 확 달라진 국제대회 정보전, 한국야구도 변화 불가피해

홈런치고 기뻐하는 미국 대표팀 닉 앨런과 환영하는 토드 프레지어(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홈런치고 기뻐하는 미국 대표팀 닉 앨런과 환영하는 토드 프레지어(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엠스플뉴스]

힘에서도 밀렸고, ‘정보전’에서도 뒤처졌다. 김경문호 도쿄올림픽 한국야구 대표팀이 7월 31일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의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조별리그 2차전에서 미국에 2대 4로 패배, B조 2위로 예선 라운드를 마감했다.

일차적으로는 미국야구의 ‘힘’에 압도당한 게 패인이다. 선발 고영표는 3회까지 잘 던지다 4회와 5회 홈런 2방을 맞고 패전투수가 됐다. 타자들은 미국 선발 닉 마르티네스의 강속구와 벌칸 체인지업 조합에 무더기 삼진을 당했다.

힘 대 힘에서 앞선 미국은 철저한 준비와 분석으로 한국이 빠져나갈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 중인 맞춤형 투수 기용에 한국 타자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어쩌다 잘 맞은 타구가 나와도 절묘한 수비 시프트에 걸려 내야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족집게 수비 시프트, 한국 맞춤형 투수 기용...우리가 알던 미국야구가 아니다

침통한 분위기의 야구 대표팀(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침통한 분위기의 야구 대표팀(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날 경기를 지켜본 야구인과 야구 관계자들은 한국의 패배 자체보다 미국야구가 보여준 경기 접근방식에 더 큰 놀라움을 표했다.

모 구단 관계자는 엠스플뉴스와 통화에서 “미국야구가 이번 올림픽을 그 어느 때보다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듯하다. 한국의 모든 선수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하고 연구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 당황하던 2006년 WBC 때와는 정반대 양상의 경기가 펼쳐졌다”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이번 올림픽 A조 예선라운드 경기를 중계한 심재학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도 “경기를 하다 보면 지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서 “그보다 미국이 선보인 수비 시프트와 벤치 볼 배합 사인이 놀라웠다. 특히 수비 시프트 같은 경우 국제대회에서 저렇게 과감한 시프트를 쓰는 건 이전에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장면”이라 말했다.

미국 대표팀은 이날 한국 좌타자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수비 시프트를 걸었다. 김현수, 오지환 등 좌타자가 등장하면 2루수가 우중간 쪽으로 이동하고 3루수가 1·2루 간으로 수비 위치를 옮겨 필드 우측에 3명의 내야수를 배치했다. 최근 메이저리그에선 트렌드로 자리 잡았지만, WBC나 올림픽 등 대형 국제경기에선 거의 쓰이지 않았던 파격 시프트다.

워낙 많은 타자가 삼진으로 물러난 탓에 시프트 효과를 확인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이날 한국 타자들은 힘 있는 미국 투수들 상대로 인플레이 타구를 거의 만들지 못했다. 35타석 가운데 14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났다. 선발 마르티네스가 9탈삼진, 스캇 맥고프와 에드윈 잭슨이 각각 2삼진을 잡아냈고 마무리 데이비드 로버트슨도 삼진 1개를 기록했다.

그러나 어쩌다 한번 잘 맞은 땅볼 타구가 나오면, 그때마다 수비 시프트 효과가 빛을 발했다. 2회초엔 1-2루 간으로 향한 오지환의 땅볼 타구가 3루수 토드 프레이저의 글러브로 향했다. 앞서 이스라엘전 4타수 3안타 맹타를 휘둘렀던 오지환은 이날 3타수 무안타(1볼넷) 2삼진에 그쳤다.

6회 이정후의 라인드라이브 타구도 2루수 정면으로 가서 잡혔고, 7회엔 주자 1, 2루에서 박건우의 잘 맞은 타구가 유격수 직선타가 됐다. 8회 박해민과 이정후의 1-2루 간 땅볼 타구도 ‘2익수’ 자리에 선 에디 아라에즈 쪽으로 향했다. 이날 2루수 아라에즈가 잡은 아웃만 7개에 달했다. 심재학 위원은 “미국이 선보인 수비 시프트는 상대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자신이 없이는 시도하기 쉽지 않다. 그만큼 미국이 한국 타자들에 대해 세밀하게 연구·분석했다는 증거”라고 감탄했다.

마이크 소시아 감독은 LA 에인절스 시절 올드스쿨 감독으로 통했지만, 이번 올림픽에선 철저하게 준비된 수비시프트와 분석에 기반한 야구를 펼치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마이크 소시아 감독은 LA 에인절스 시절 올드스쿨 감독으로 통했지만, 이번 올림픽에선 철저하게 준비된 수비시프트와 분석에 기반한 야구를 펼치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한 데이터 분석 전문가는 “메이저리그의 뛰어난 정보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경기”라고 평가했다. 이 전문가는 “경기 내용으로 볼 때 미국이 한국 선수들의 트랙맨 데이터를 입수해 투수 공략과 시프트 등에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메이저리그 구단이 평상시 지역 스카우트를 통해 수집한 KBO리그 선수 정보까지 감안하면, 우리가 흔히 ‘전력분석’하면 생각하는 수준 그 이상으로 세밀하고 방대한 분석이 이뤄졌을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한국 대표팀은 데이터보다는 전통적인 방식의 전력분석에 비중을 뒀다. 29일 상대한 이스라엘은 최일언 투수코치와 김평호 전력분석원이, 31일 상대 미국의 전력은 김경문 감독이 직접 미국을 방문해 눈으로 보고 장단점을 분석했다. 물론 KBO가 제공한 데이터 자료가 있긴 하지만, 현장 야구인의 통찰력과 감을 중시하는 대표팀 코칭스태프 구성으로 볼 때 활용도는 그리 높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모 구단 관계자는 “지난 몇 년간 미국 메이저리그에선 ‘데이터 혁명’이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트랙맨 등 새로운 측정 도구가 등장하면서, 과거 수십 년 동안 이룬 것보다도 훨씬 많은 발전이 최근 몇 년 사이 진행됐다. 구단들은 선수 영입과 상대 분석, 라인업과 투수 기용은 물론 선수 육성 단계에서부터 데이터를 활용한다”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미국은 물론 29일 상대한 이스라엘 대표팀도 한국 상대로 상당한 수준의 수비시프트를 구사했다. 메이저리그 구단이 축적한 방대한 데이터가 어떤 식으로든 이스라엘 쪽에 제공됐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에 대한 분석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과거 국제대회가 서로 잘 모르는 깜깜이 상태에서 이뤄졌다면, 데이터 혁명이 진행 중인 지금은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정보전이 펼쳐질 것이다.”

데이터 혁명 이후 확 달라진 국제대회 정보전, 대표팀 준비 프로세스도 변화 불가피

오지환 등 좌타자들의 타구는 치는 족족 야수 정면으로 향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오지환 등 좌타자들의 타구는 치는 족족 야수 정면으로 향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미국전 패배로 한국 대표팀의 남은 올림픽 일정은 가시밭길이 됐다. 당장 오늘 저녁 7시부터 A조 2위 도미니카공화국 대표팀과 녹아웃 스테이지 첫 대결을 치러야 한다. 여기서 이기면 몇 시간 뒤인 2일 정오에 곧바로 녹아웃 스테이지 2라운드 경기가 예정돼 있다.

만약 2라운드에서 패하면 3일에 패자부활전 1라운드를 치르고, 여기서 이기면 4일에 또 패자부활전 2라운드를 치러야 해 휴식일 없이 5일 연속 경기를 치를 수도 있는 스케쥴이다. 녹아웃 스테이지 2라운드에서 승리해야 하루 휴식을 취한 뒤 4일 열리는 준결승에서 일본과 대결할 기회가 주어진다.

일본야구에 정통한 야구 원로는 “일본이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상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들었다. 이나바 아츠노리 감독이 직접 한국팀의 경기를 관전한 것은 물론, 트래킹 데이터와 KBO리그 영상 자료까지 모두 가져가 분석한 것으로 안다”면서 “반면 한국 쪽에선 일본야구 영상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여건이다. 과연 대표팀이 일본 전력에 대해 어느 정도나 파악하고 있을지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한 데이터 분석 전문가는 “지금은 대부분의 구단이 전통적인 방식의 전력분석과 데이터 분석을 모두 활용해 팀을 운영한다. 수비 시프트를 적극적으로 쓰는 팀도 많고, 어떤 팀은 타자들의 타격 어프로치까지 데이터 분석을 바탕으로 변화를 준다”면서 “리그에서는 활발하게 데이터 분석을 활용하는데 정작 최고 선수들이 모인 국제대회에선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의문”이라 지적했다.

모 구단 관계자도 “물론 한국 대표팀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겠지만, 정보전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 최근 야구에선 단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면서 “WBC와 올림픽의 성공 이후 십여 년간 큰 변화가 없었던 국제대회 준비 프로세스에 이제는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이번 올림픽이 그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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