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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케이트보드 ‘전설’ 이상이 “1세대란 자부심엔 큰 책임감이 따른다” [엠스플 피플]

  • 기사입력 2021.10.07 04:00:02   |   최종수정 2021.10.07 02: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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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케이트보드 ‘산증인’ 이상이 프로

-“영화 백 투 더 퓨처 주인공 맥플라이보다 훨씬 잘 타고 싶었죠”

-“20대 초반까지 스케이트보드로 먹고산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회사에 사표 제출 후 3년간 스케이트보드에 집중했죠”

-“끝을 알 수 없는 스케이트보드 매력, 더 널리 알리는 게 내 마지막 꿈”

 

한국 스케이트보드 '산증인' 이상이 프로(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 스케이트보드 '산증인' 이상이 프로(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

 

백 투 더 퓨처. 한국에서 1987년 7월 17일 개봉한 미국 영화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오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세계적인 흥행으로 백 투 더 퓨처는 3편까지 나왔다. 

 

백 투 더 퓨처를 보고 꿈을 키운 인물이 있다. 한국 스케이트보드 산증인 이상이 프로다. 

 

이 프로는 백 투 더 퓨처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가 항상 들고 다닌 것에 눈이 갔다. 스케이트보드였다.  

 

이 프로에게 스케이트보드는 낯설지 않았다. 1985년 동네 형들을 따라서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으로 향한 날이었다. 형들은 동대문체육사란 곳에서 스케이트보드를 샀다. 그걸 타는 형들을 보고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프로는 친구들과 돈을 모아 스케이트보드 하나를 사 매일같이 탔다. 백 투 더 퓨처를 보고선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이 프로의 삶은 한국 스케이트보드 역사와 함께한다. 이 프로는 한국 최초 스케이트보드 공연으로 돈을 번 인물이다. 한국 최초로 프로 계약을 맺고 활동한 프로선수이기도 하다. 엠스플뉴스가 한국 스케이트보드 산증인 이 프로를 만났다. 

 

이상이 프로 “영화 백 투 더 퓨처 주인공 맥플라이보다 훨씬 잘 타고 싶었죠”

 

이상이 프로(사진 맨 위)는 학창 시절부터 스케이트보드를 즐겼다(사진=엠스플뉴스)

이상이 프로(사진 맨 위)는 학창 시절부터 스케이트보드를 즐겼다(사진=엠스플뉴스)

 

스케이트보드가 2020 도쿄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습니다. 한국 스케이트보드를 대표하는 인물이 누군지 수소문했어요. 모든 분이 공통으로 한 말이 있습니다. “한국 스케이트보드는 이상이 프로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겁니다. 

 

과찬입니다. 제가 스케이트보드를 누구보다 사랑하다 보니 좋게 말씀해 주신 것 같아요(웃음). 

 

지금은 이상이보드스쿨 대표로 스케이트보드를 가르치고 있는 겁니까. 

 

다양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이보드스쿨이란 곳에서 스케이트보드를 가르쳐요. 스케이트보드를 전문적으로 타는 분뿐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이나 학생도 가르치죠. 더 있습니다. 

 

뭐죠. 

 

스케이트보드 프로 생활을 이어가면서 국가대표 선별 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말씀 주신 것처럼 스케이트보드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에요. 한국 스케이트보드가 지금보다 발전하는 데 이바지해야죠.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스케이트보드와 인연은 어떻게 맺은 겁니까. 

 

동대문운동장 기억하세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을 말하는 겁니까. 

 

네. 1985년쯤일 겁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시기였죠. 동네 형들 따라서 동대문운동장으로 향했어요. 옛날 동대문운동장엔 스포츠용품을 판매하는 곳이 아주 많았습니다. 축구, 야구 등 스포츠 경기뿐 아니라 볼거리가 넘치는 장소였죠. 형들이 동대문체육사란 곳에서 붕어빵 모양의 스케이트보드를 샀어요. 그게 첫 만남이었습니다. 

 

형들 따라서 나갔다가 스케이트보드를 만난 거군요. 

 

형들이 사니깐 따라서 구매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비쌌어요. 1985년 당시 가격으로 8천900원쯤 했을 겁니다. 직장인 평균 급여가 30만 원이 채 안 될 때였어요. 머릴 썼죠.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친구들에게 “아주 재미난 걸 찾았다. 돈 모아서 하나 사자”고 했죠. 친구들과 스케이트보드 하나 구매해서 종일 놀았어요. 그러던 중 영화 ‘백 투 더 퓨처’를 봅니다. 

 

지금도 회자되는 명작 아닙니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인생 영화죠. 백 투 더 퓨처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맥플라이가 영화 속에서 좋아한 게 스케이트보드였어요. 항상 스케이트보드와 함께 다녔죠. 잘 탔고요. 미래에선 하늘을 날아다니는 스케이트보드까지 나왔습니다. 

 

인생 최고의 영화로 꼽는 이유가 있군요. 

 

스케이트보드가 운동신경을 상당히 요구하는 운동이에요. 제가 운동신경이 없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학창 시절 농구를 아주 좋아했어요. 방과 후 농구 하는 게 일상이었죠. 덩치가 좋아서 학교 씨름부에 들어갈 뻔하기도 했고요(웃음). 중학교 땐 역도부 생활을 했습니다. 다양한 운동을 접하다 보니 스케이트보드를 배우는 속도가 빨랐어요. 

 

운동선수로 성장할 생각은 안 했습니까. 

 

스케이트보드만큼 제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습니다. 백 투 더 퓨처가 한국에선 1987년 여름(7월 17일) 개봉했어요. 영화를 보고 스케이트보드에만 집중했습니다. 매일 넘어지기 일쑤였지만 성취감이 대단했어요. 기술 하나를 완벽히 구사했을 때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죠. 그 성취감이 스케이트보드와 평생을 함께하도록 해주는 것 같아요.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들고 다니는 분을 쉽게 마주할 수 있습니다. 당시엔 어땠습니까. 

 

1980년대입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들고 다니면 모두가 한 번씩 쳐다봤어요. ‘저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하는 눈빛이었죠(웃음).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유튜브에서 스케이트보드를 배운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죠. 형들을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방법뿐이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였습니까. 

 

잘 타는 형들은 쉽게 자기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제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죠. 그래서 심부름을 많이 했습니다(웃음). 형들이 원하는 걸 하나 해줄 때마다 기술을 배울 수 있었어요. 형들이 타는 걸 눈으로 유심히 보면서 따라 하길 반복했고요. 동대문이나 이태원에 있는 헌책방도 자주 갔습니다. 

 

스케이트보드와 헌책방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겁니까. 

 

헌책방엔 미국 스케이트보드 잡지가 있었어요. 기술이 사진으로 자세하게 나와 있었죠. 동작 하나하나를 보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이 기술을 어떻게 응용할지 매일 토론했고요. 열정적이었죠. 

 

“20대 초반까진 스케이트보드로 먹고산다는 건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죠”

 

이상이 프로(사진=엠스플뉴스)

이상이 프로(사진=엠스플뉴스)

 

학창 시절부터 스케이트보드와 쭉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 스케이트보드 프로선수를 꿈꾼 겁니까. 

 

스케이트보드로 먹고산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죠. 그냥 스케이트보드가 좋았어요. 스케이트보드에 집중하는 모든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누구보다 잘 타고 싶은 마음이 컸고요. 사실 처음 스케이트보드를 배울 때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마음고생이요?

 

몸이 단단한 편이었습니다. 날렵한 체형이 아니었죠. 형들이 “스케이트보드는 너와 같은 애들이 타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배우고 싶다고 하니 “금방 포기할 것”이라고 확신했죠. 그 얘기가 큰 상처였어요. 스케이트보드가 좋아서 탄다는 건데... 

 

스케이트보드에 알맞은 체형이 있습니까. 누구나 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몸이 가벼우면 유리한 면이 있죠. 하지만, 덩치가 있다고 해서 스케이트보드를 못 타는 건 아닙니다. 누구든지 연습하면 잘 탈 수 있어요. 제가 증명했습니다. 학창 시절 하루 10시간 이상 스케이트보드와 함께했어요. 실력이 빠르게 늘었죠. 형들도 결국엔 인정했습니다. 형들이 “너 같은 얘는 처음 본다. 정말 대단하다. 인정한다”고 했죠. 아주 뿌듯했어요. 

 

부모님이 스케이드보드 타는 걸 반대하진 않았습니까. 

 

어릴 때 부모님 속을 꽤 썩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죠. 스케이트보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자주 싸웠어요. 그런데 스케이트보드에 빠지고 난 이후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 잡지를 보면서 기술 연마에 매진했죠. 부모님이 “이젠 공부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자주 했지만 스케이트보드를 못 타게 하진 않았습니다. 감사하죠(웃음). 

 

국내엔 적수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외 무대에 도전할 기회는 없었습니까. 

 

1993년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어요. 제가 스케이트보드 타는 영상을 보고 연락이 온 겁니다. 미국에서 스케이트보드 선수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죠. 기회였어요. 하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두려웠어요. 평생 한국에서만 살았습니다. 낯선 땅에 적응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죠.

 

한국에서만 스케이트보드를 탄 겁니까. 

 

전국을 누비면서 스케이트보드를 탔죠. 부산을 자주 갔어요. 부산에 숨은 고수들이 많았거든. 

 

부산에 숨은 고수가 많았던 이유가 있습니까. 

 

일본이 스케이트보드 강국이에요. 2020 도쿄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3개와 은, 동메달 각각 1개씩을 거머쥐었습니다. 그런 일본과 옛날부터 왕래가 잦았던 곳이 부산이에요. 그래서인지 부산 친구들이 스케이트보드를 아주 잘 탔습니다. 그들과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면 재미가 남달랐죠. 서울에선 대학로 바탕골 소극장이 모임 장소였어요. 

 

대학로 바탕골 소극장이요?

 

휴대전화는 물론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주말만 되면 바탕골 소극장에 스케이트보드인들이 모였습니다. 토요일은 보통 오후 3시, 일요일은 오전 11시부터 스케이트보드를 즐겼죠. 자기만의 기술을 뽐내고 다양한 정보를 공유했습니다. 대회가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모임이 참 중요했어요. 혼자서는 기술 향상에 한계가 있으니까. 

 

스케이트보드로 먹고사는 건 지금도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을 듯한데요.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죠. 학생 땐 걱정이 없었습니다.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엔 달랐습니다. 함께 스케이트보드를 즐겼던 형들이 스케이트보드를 안 탔어요. 스노보드를 빠르게 배워 강사를 했습니다. 한 번은 아주 친한 형에게 울면서 얘기했어요. 

 

울었다고요?

 

매일 10명 이상이 모여 스케이트보드를 즐겼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저 혼자인 거예요. 외로웠습니다. 서러웠어요. 친한 형을 만나서 “왜 스케이트보드 안 타느냐”고 물어봤습니다. 형이 “미안하다. 스케이트보드는 미래가 없다. 이젠 스노보드만 타야 할 것 같다”고 했죠. 

 

스케이트보드를 그만 타고 스노보드의 길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까. 

 

전혀요. 속으로 “나는 절대 형들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스케이트보드와 빠르게 멀어졌습니다. 일과 마치면 피곤하잖아요. 주말엔 집에서 쉬는 데만 집중했죠. 스케이트보드 탈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제게 말했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아주 친한 형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는 거예요. 친구가 “너는 평생 스케이트보드와 함께할 것처럼 얘기하더니 별반 다르지 않네”라고 했죠. 24살 때였습니다. 충격이 컸어요. 스케이트보드는 저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평생을 함께할 것으로 확신했는데 아니었던 거예요. 지난 시간을 돌아본 뒤 직장에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회사에 사표 제출 후 3년간 스케이트보드에 집중했습니다”

 

성인이 된 후 이상이 프로와 스케이트보드를 즐겼던 사람이 하나둘 떠나갔다.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한 것이었다(사진=엠스플뉴스)

성인이 된 후 이상이 프로와 스케이트보드를 즐겼던 사람이 하나둘 떠나갔다.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한 것이었다(사진=엠스플뉴스)

 

직장에 다니면서도 스케이트보드를 즐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학창 시절부터 우리가 스케이트보드 1세대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스케이트보드의 역사를 이어가야 한다고 믿었어요. 직장에서 벌어둔 돈이 조금 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케이트보드에만 집중해보자고 생각한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했죠. 고생 많이 했습니다. 

 

사표 제출 후 생활 어땠습니까. 

 

스케이트보드로 돈을 벌 방법이 없었어요. 제가 제아무리 멋진 기술을 선보인다고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니까. 올림픽 종목은커녕 동네 대회조차 없는 상황이었죠. 주머니에 돈이 없었어요. 소주 한 병조차 마음 편히 살 수 없었습니다. 후회 많이 했습니다. 왜 이렇게 미련한 선택을 했을까 원망했어요. 그러던 중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적이요?

 

27살 봄이었습니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나온 지 3년째 되는 해였죠.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취직을 알아봤습니다. 제가 화학공학과를 나왔어요. 전공을 살려서 구로구청 환경과 1년 계약직에 도전했죠. 면접 하루 전이었습니다. 시간도 기억해요. 오후 6시였습니다. 전화를 받았죠. 영등포 롯데백화점 마케팅 팀장님이었습니다. 

 

영등포 롯데백화점에도 이력서를 제출했었습니까. 

 

영등포 롯데백화점에선 제가 할 일이 없죠. 지원한 적이 없었어요. 영등포 롯데백화점 마케팅 팀장님이 “백화점 앞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 달라. 한 달에 70만 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꿈인가 싶었어요. 

 

기적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네요. 

 

한국에서 스케이트보드를 가장 잘 탄다는 소문을 듣고 제 연락처를 알아낸 거였어요. 고민할 필요 없었습니다. 다음 날 구로구청 환경과 면접장이 아닌 영등포 롯데백화점으로 향했어요. 스케이트보드로 돈을 벌기 시작한 겁니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의 감정 기억합니까.

 

하얀 봉투에 월급을 넣어줄 때입니다. 뿌듯했죠. ‘드디어 해냈구나’ 싶었습니다. 1년 내내 일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4월부터 10월까지 7개월 단기 계약이었습니다. 봄부터 여름까지라고 보면 돼요. 날이 쌀쌀해지면 사람들이 밖에 서 있을 수 없으니 겨울은 쉬어가는 시기였죠.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어요. 스케이트보드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걱정이 싹 사라졌을 듯합니다. 

 

첫해 계약이 마무리될 때쯤 연장계약을 맺었습니다. 반응이 괜찮았던 거예요. 그간 익힌 기술을 뽐내면 사람이 하나둘 모여들었죠. 제 모자에 돈을 넣어두고 가는 분도 꽤 있었어요. 백화점에서 크게 만족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죠. 제 이름을 더 알렸어요. 후원해주겠다는 분도 늘었죠. 그러던 중 또 한 번의 기회를 마주합니다. 

 

“스케이트보드 매력을 더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고 싶습니다”

 

한국 스케이트보드 산증인 이상이 프로(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 스케이트보드 산증인 이상이 프로(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어떤 기회였습니까. 

 

1999년 스포츠용품 중견기업 제이슨상사와 프로 스케이트보드 선수 계약을 맺었습니다. 한국에서 스케이트보드 프로 계약을 맺은 최초의 사례였어요. 연봉이 1천800만 원으로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프로는 뭐가 달랐습니까. 

 

행사 수가 엄청나게 늘었죠. 후배 몇 명을 합류시켜서 팀도 꾸렸습니다. 회사에서 후배들에게도 연봉을 지급했던 건 아니에요. 행사를 다니면서 후원받을 기회를 제공했죠. 행복했습니다. 스케이트보드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어요. 마인드도 바뀌었습니다. 

 

마인드요?

 

프로스포츠 선수들이 ‘프로 의식’을 자주 이야기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았어요. 자그마한 행동 하나가 스케이트보드 타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마음에 새겼죠. 프로답게 행동하려고 했습니다. 좋아하는 술자리도 최대한 멀리했고요. 대회에 출전하면 반드시 입상해야 한다는 부담도 생겼습니다(웃음). 프로니까. 회사에서도 어떤 대회든 3위 안에 들길 원했고요. 

 

스케이트보드계의 개척자입니다. 

 

책임감이 크죠. 제가 어떤 길을 만들어놓느냐에 따라서 후배들의 삶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가족에게도 인정받고 싶었어요. 아버지께선 10년 전까지 제 직업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늘 ‘너 아직도 스케이트보드 타느냐’고 했죠. 지금은 아닙니다.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아카데미까지 운영하는 걸 자랑스러워하세요.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배우려는 사람이 늘었을 듯합니다. 

 

강습을 원하는 분이 확 늘었죠. 올림픽 정식 종목이란 게 대단하긴 해요(웃음). 특히나 학부모님들의 관심이 큽니다. 태권도처럼 자녀들에게 스케이트보드를 한 번쯤은 경험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학생들이 스케이트보드의 매력에 더 깊이 빠질 수 있도록 제가 잘 가르쳐줘야 합니다. 이 얘길 꼭 강조하고 싶어요. 

 

어떤?

 

프로선수만 프로페셔널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프로 스케이트보드 선수가 꿈이고 국가대표까지 넘본다면 어릴 때부터 프로페셔널해야 해요.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후배가 꽤 있습니다. 자기 행동 하나하나가 스케이트보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특히나 스케이트보드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란 걸 명심해야 합니다. 대중의 관심이 아주 커졌어요. 

 

지금은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많은 분의 도움으로 제 꿈을 하나둘 이뤘습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면서 돈을 벌고 있어요. 학창 시절엔 꿈조차 꿀 수 없던 일이 일어난 겁니다. 제 이름이 박힌 스케이트보드도 나왔어요. 캐나다 모 브랜드에서 제 이름이 박힌 스케이트보드를 만들어줬죠. 스케이트보드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브랜드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꿈은 이거예요. 

 

네?

 

지금은 서울에서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스케이트보드를 더 널리 알리고 싶어요. 전국에 수많은 이가 쉽게 찾을 수 있는 대형 스케이트보드 공원이랄까요. 학생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면서 꿈을 키워갔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연습에 매진한다면 저처럼 오랫동안 스케이트보드와 함께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돕겠습니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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